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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자살은 ‘극단적 선택’ 아닌 ‘사회적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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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

2003년부터 매년 9월 10일은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제정한 ‘세계 자살 예방의 날’(World Suicide Prevention Day)이다. 필자가 2012년 세계은행 총재가 됐을 때 각국 정상들로부터 ‘한국의 기적’에 대한 찬사를 듣고 매우 기뻤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한국이 어떻게 약 두 세대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고속 성장했는지 궁금해한다. 게다가 최근엔 K팝과 한류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문화 현상이 됐다.

‘자살률 1위국’ 오명 언제까지
남은 가족도 고통 속에 살아가
일본처럼 예방에 적극 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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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의 성공이 정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점에 각국 리더들로부터 조금 다른 질문을 듣곤 한다. “한국은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자살률은 왜 이렇게 높은가.” 또 다른 지도자들은 한국의 출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국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라고 묻기도 한다.

사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 자살이라는 측면에서 ‘상시적 재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 중에 단 두 해를 제외하고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하루에 36명, 매년 1만3000명 이상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자살 이후에 남겨진 가족은 크나큰 고통과 사회적 낙인을 안고 살아간다. 지난 3년간 한국은 코로나19로 잃은 국민보다 자살로 더 많은 국민을 잃었다. 한국 여성의 자살률은 OECD 평균의 3배에 이르며, 자살은 10~30대의 사망 원인 중 1위다.

단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도 자살로 인해 연간 수십조의 손실이 발생한다. 최근 경제학 연구에 따르면 자살로 인한 한국의 사회적 비용은 암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비슷한 수준이라 한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국민의 생존권이 포함된다. 헌법 34조 6항에는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의 이런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살이라는 현재진행형 재난에 맞서기 위한 단호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다. “우리는 우리 국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뉴스에 어느덧 무감각해진 것 아닌가”라고. 일본은 자살 예방 노력 차원에서 한국의 20배 가까운 예산을 투자해 10년 만에 자살률을 30% 줄이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 한국의 두 배였던 일본의 자살률은 이제 한국 자살률의 3분의 2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제 한국도 자살 예방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자살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야 한다. 자살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실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인식 전환은 ‘사회적 실패’를 ‘사회적 승리’로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임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 4명 중 1명은 가깝고 의미 있는 관계의 사람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한국이 역사 속 위기의 순간에 한마음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듯 자살이라는 치명적 전염병에 맞서기 위해 함께 손을 잡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WHO에서 고 이종욱 사무총장과 함께 일할 당시 2년 반 안에 개발도상국 국민 300만 명에게 에이즈 치료제를 제공하자는 목표를 설정했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2500만 명의 에이즈 환자 중 단 수천 명만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많은 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아프리카에서 에이즈를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투자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에서 1700만 명이 에이즈 치료를 받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에이즈 치료를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단합된 노력과 과감한 투자를 통해 한국의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인과 함께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손을 맞잡고 일할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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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