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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이창호와 창하오, 단맛 쓴맛 주고받은 두 사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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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2007년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른 이창호(왼쪽)9단과 중국의 창하오 9단. [사진 사이버오로]

2007년 삼성화재배 결승에 오른 이창호(왼쪽)9단과 중국의 창하오 9단. [사진 사이버오로]

창하오 9단이 중국바둑협회 주석이 됐다. 올봄 한국기원 양재호 사무총장은 “창하오 9단이 중국기원을 맡게 되면 바둑리그에 중국팀 참가도 가능할 것 같다. 기대가 크다”고 했는데 얼마 전 전국 성 대표 등이 모인 대회에서 창하오가 신임주석으로 선출됐다. 임기는 5년.

창하오가 화제가 되자 가장 먼저 이창호 9단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름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두 사람. 이들의 인생은 승부로 치열하게 얽혔고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주고받았다. 긴 세월의 격전 끝에 친구가 됐다. 이창호 1975년생, 창하오 1976년생. 한 살 차이지만 이창호는 세계 최강자였고 창하오는 뒤를 쫓는 추격자였다. 중국은 바둑 종주국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어했고 그 염원을 창하오에게 걸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둘이 처음 격돌한 1997년엔 1승 1패를 거두더니 이후 4년간 창하오는 이창호에게 12연패를 당하고 만다. 이창호의 최전성기는 대략 2004년까지다. 이때까지 7년간 창하오는 이창호에게 4승 20패. 결승전마다 패배했고 4강, 8강전에서의 고비에서도 이창호만 만나면 졌다. 창하오는 철저히 무너졌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인생의 밑바닥을 맛봤다. 그러나 창하오는 2004년 12월 열린 5회 응씨배 결승전에서 최철한 9단을 꺾고 세계대회 첫 우승컵을 따내며 기적같이 살아난다. 중국은 환호했다.

“여기가 밑바닥이구나 싶으니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창하오는 말했다. 아무도 볼 수 없고 깜깜한 바다 깊은 곳, 그곳에서부터 창하오는 다시 일어섰다. 조금 쓸쓸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우승 소감이었다.

2007년 창하오는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드디어 이창호를 이겼다. 다시 2년 후 춘란배 결승에서 이창호를 또 꺾었다. 창하오는 평생의 소망을 달성했다. 이창호를 이기기까지 가시밭길을 참 오래 걸었다.

언젠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 만찬장에서 시진핑 주석은 박 전 대통령을 창하오 앞까지 데리고 가 “이 사람이 한국의 석불(石佛)을 꺾은 사람입니다”고 소개했다. 그 소식을 접하며 나는 실소했다. ‘석불에게 항시 졌는데 이긴 것만 기억하는구나. 하기사 이창호를 이기는 게 소원이었는데 창하오가 그 소원을 풀어줬으니까 모두들 뛸 듯이 기뻤겠지. 해서 시진핑 주석도 그 승리만을 기억하는구나.’

창하오는 인상이 부드럽고 성품이 친절하다. 그래서인지 독한 승부사라기보다는 사람 좋은 이웃 같은 느낌을 준다. 하나 승부사로서의 창하오는 생명력이 남다르다. 중국 최강자 녜웨이핑 9단은 조훈현 9단에게 패배한 뒤 일찌감치 승부 무대를 떠났고 뒤를 이은 마샤오춘 9단도 이창호에게 연패한 뒤 역시 무대를 떠났다. 창하오는 이창호에게 누구보다 아프게 연전연패했으나 끝끝내 살아남았다. 2010년 마지막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서 한국의 새 강자 이세돌 9단에게 패배했지만 그의 승부사로서의 여정은 질긴 생명력 그 자체였다. 문득 그런 강인한 정신력이라면 협회 주석 임무도 잘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호 9단이 이런 소감을 남겼다.

“함께 바둑을 두던 창하오 9단이 (중국바둑협회) 주석이 됐다니 감회가 새롭다. 중국에 가서 만나게 되면 기분이 묘할 것 같다. 주석이 된 것을 축하한다. 기사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기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국과 중국바둑을 위해, 기사를 위해 잘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파릇파릇한 20대 시절 싸우고 또 싸운 두 사람. 세월이 흘러 창하오가 중국바둑의 행정책임자로 변신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옛이야기를 더듬어 봤다. 이창호 때문에 맛본 인생의 쓴맛이 바둑행정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창호는 여전히 바둑판과 더불어 산다. 생각하면 인생행로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냥 흘러갈 뿐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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