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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핵 질주’에 굶주리는 북한 주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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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대북전략센터장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대북전략센터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있다. 군 최고 수뇌 회의에서 ‘전선 공격 작전계획과 전투 문건들을 요해(파악)’하며 서울과 평택의 주한미군 기지를 겨냥했다. 장갑차를 타고 전쟁 준비를 독려했다. 이러한 행보는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8월 18일)과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을 계기로 군사력을 부풀리면서 체제 결속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김 위원장의 무모함을 고려할 때 실제 도발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어느 때보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경제-핵 병진’ 노선 접은 김정은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는 뒷전
원칙 분명한 대북 정책 펼쳐야

[일러스트=김지윤]

[일러스트=김지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첫해였던 2012년 김일성 주석 100주기 연설에서 두 가지 공약을 제시했다. 국방력 강화와 함께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방책으로 제시한 것이 ‘경제-핵 무력 병진 노선’이었다. 핵 보유와 먹고사는 문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은 핵·미사일 능력 제고에 올인해 2017년 11월 서둘러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더니 이후 경제건설 노선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핵을 카드로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은 2019년 북·미의 ‘하노이 노딜’로 벽에 부닥쳤다. 병진 노선의 허구성이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도 김 위원장은 핵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2021년 초 8차 당 대회에서 무기체계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전술핵과 극초음속 미사일, 수중발사 핵 전략무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핵잠수함, 무인기, 초대형 핵, 고체 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이른바 ‘군 9대 과업’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핵잠수함을 빼면 이들 과업은 2년 반 만에 모두 ‘실물’이 공개될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자원을 최대한 쏟아붓고 있다는 의미다. 극초음속 미사일(화성-8형)은 거의 완성 단계이고, 고체 연료 ICBM은 지난 2월 초 군 창건 열병식 공개 이후 능력을 향상 중이다. 수중발사 핵전략 무기(해일)와 전술 핵탄두(화산-31)는 3월 말 공개됐다.

전략 무인정찰기(샛별-4형)와 공격형 무인기(샛별-9형), 핵 어뢰는 7월 말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부 장관이 참석한 무인장비전시회와 전승절 열병식에서 공개했다. 이 무기들의 수준에 대해서는 회의적 평가가 많지만, 김 위원장은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북한 매체들도 “상상할 수 없는 짧은 기간에 빛나는 위업 완성”이라며 찬양 일색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 김 위원장이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는 동안 인민들의 삶은 절망적이다. 국제기구들은 북한 인구의 약 절반(45.5%)이 영양부족 상태라고 보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옥수수와 쌀값이 폭등하고 아사자가 지난 5년 평균의 2배가 넘을 만큼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집단 항의까지 벌어졌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못지않은 어려운 상황이란 얘기다.

통치의 기본은 민초의 쌀독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백성의 삶을 돌보는 일이 통치자의 첫째 임무(誠牧民之首務)’라고 역설했다. 김일성 주석도 “쌀은 곧 사회주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세습 3대가 이어지도록 북한 정권은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굶주림과 고통의 원인은 자연재난도 코로나19 사태도 아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에다 김 위원장의 정책 실패가 중첩된 필연적 결과다. 김 위원장의 전략은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핵과 경제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를 정해 놓고 위기를 조장하면서 주민을 공포와 굶주림으로 내몰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추구하는 목표가 주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딜레마에 빠져있다.

김 위원장이 생존의 셈법을 바꿀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전략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발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며, 벼랑 끝 전술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북한 주민들도 깨닫게 해야 한다. 김 위원장의 생각과 행동이 변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대북전략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