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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맥아더의 역사적 인천상륙, 중공군 참전도 막았더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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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인천 ‘새우섬(하도·소무의도)’의 영욕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인천국제공항을 지나 조금 가다가 왼쪽으로 빠지면 무의도로 향한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무의도에 쉽게 간다. 이 다리를 건너서 무의도를 가로질러 끝으로 가면 소무의도를 만나는데 원래 이름은 하도(鰕島), 즉 새우섬이다.

이 섬은 아주 작아 걸어서 한 시간이면 일주한다. 그리고 이 섬 정상에는 하도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여기서 전면을 바라보면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 바다에 70여 척의 군함이 집결해 4척의 순양함과 8척의 구축함 함포에서 45분간 2845발의 포탄이 발사되면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하도정에서 바라봤다면 아마도 장관이었다.

6·25 ‘격랑의 현장’ 한눈에 들어와
45분간 포탄 2845발 쏟아진 그곳

“중공 참전 안 할 것” 무리한 북진
정주~흥남라인 지켰으면 어땠을까

‘인천 성공’에 자신감 넘친 맥아더
지도자는 길게 보는 안목 갖춰야

맥아더, 서울 탈환에 오랜 시간

인천시 소무의도(하도) 섬카페에서 바라본 팔미도 풍경. 팔미도 뒤로 월미도에 있는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유재성, 김정탁]

인천시 소무의도(하도) 섬카페에서 바라본 팔미도 풍경. 팔미도 뒤로 월미도에 있는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유재성, 김정탁]

인천상륙작전은 어려운 확률을 뚫고 이뤄낸 기적적인 군사작전이다. 맥아더 참모장 앨먼드(E Almond) 소장이 작전을 준비했어도, 이를 기획한 맥아더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다. 맥킨리 함정 위에서 맥아더가 참모들에게 둘러싸여 작전을 지시하는 유명한 사진에서 맥아더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앨몬드다. 그는 3개월 후 10군단장으로서 흥남철수작전도 지휘했는데, 그의 승인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미군 함정에 올라타 남한에 올 수 있었다. 그런 그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들과 사위의 전사통보를 같은 날 받은 슬픈 사연의 주인공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후 맥아더가 지휘한 한국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먼저 맥아더는 서울 탈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에 올라오는 시간만큼 오래 걸렸는데 북한군 저항이 그만큼 심해서다.

이럴 때는 서울을 우회해 외곽에서 북한군을 차단한 뒤 동쪽으로 즉시 이동해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오는 아군과 빨리 합류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북한군이 고립돼 전쟁을 쉽게 끝낼 수 있다. 그러니 서울 탈환은 상륙작전의 첫 번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서울 탈환에 집착해 북한군이 북으로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원산상륙작전, 의욕과 오판

소무의도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와 팔미도. [사진 유재성, 김정탁]

소무의도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와 팔미도. [사진 유재성, 김정탁]

또 맥아더는 원산에서 다른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그래서 인천에 막 상륙한 10군단을 다시 배에 태워 동해로 이동시켰는데 거리만도 1400㎞였다. 이런 무리수에도 원산 앞바다 기뢰를 제거하느라 상륙작전이 계속 지연되었다. 그 사이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국군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해 상륙작전이 필요 없어졌다. 10군단은 그로부터 2주 후인 10월 25일에야 원산에 상륙했다. 애초부터 원산상륙작전을 계획하지 않았으면 합동작전이 최소한 2주 먼저 전개돼 평안도 일대를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다. 낭림산맥이란 거대한 장벽을 어떻게 극복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2주의 시간은 매우 중요했다.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 [사진 유재성, 김정탁]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 [사진 유재성, 김정탁]

게다가 맥아더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으로 진격하면 중공군이 참전할 거라는 중국 측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했다. 이 경고를 외교적 협박으로 봐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기세등등해진 맥아더를 미 정부 내에서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 합참이 미군을 중국 접경지대로 진격하지 말라고 뒤늦게 지시했어도 맥아더는 압록강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웨이크섬으로 날아갔는데 중공군 참전이 없을 거라는 그의 주장만 되풀이해 들었다. 그때 중공군은 30개 사단 규모인 3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서 이미 북한 땅에 들어와 있었다.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의 정자 편액. [사진 김정탁]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의 정자 편액. [사진 김정탁]

당시 중국 수뇌부는 한국전 참전을 내키지 않았다. 대륙을 통일해 정부를 수립한 지 1년도 안 된 데다 세계 최강인 미군과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다. 중공군 최고 전략가인 린뱌오(林彪)가 신병을 이유로 모스크바에 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런데도 중공군 파병이 이루어진 건 압록강을 경계로 미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맥아더가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에게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 지 정확히 10일 후 미군은 평북 운산리에서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추수감사절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겠다는 맥아더의 과욕이 이런 참사를 빚었다.

넉 달 만에 다시 빼앗긴 서울

맥킨리함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유엔군 수뇌부. 망원경을 들고 앉아 있는 맥아더 장군과 그 오른쪽의 앨먼드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맥킨리함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유엔군 수뇌부. 망원경을 들고 앉아 있는 맥아더 장군과 그 오른쪽의 앨먼드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중공군의 기습으로 아군은 서둘러 청천강까지 후퇴했는데 맥아더는 한 달 후 다시 북진을 명령했다. 이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 싶어서였는데 이 명령은 재앙에 가까운 대실패로 끝났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 7개 연대가 무너지고, 미 2사단은 ‘인디언 태형’으로 와해하였다. 이 패배는 미 육군 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로 기록된다.

동부전선에서도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완전히 포위돼 사상자 3000여 명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운산리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처음 받았을 때 북진을 멈춰야 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맥아더는 중공군을 소수라고 여겨 판단을 그르쳤다.

인천 앞바다에 상륙작전을 위해 집결해 있는 연합군 함정들. [사진 위키피디아]

인천 앞바다에 상륙작전을 위해 집결해 있는 연합군 함정들. [사진 위키피디아]

중공군이 전선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자 유엔군 방어선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그래서 서울을 탈환한 지 4개월도 안 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면 운산리에서 미군이 첫 패배를 당했을 때 크리스마스 공세 대신 정주(청천강 입구)~흥남에 방어선을 쳤어야 했다. 그러면 아군은 산악지대 깊숙한 곳으로 유인되는 중공군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아 패배하지 않았다.

또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이 방어선을 충분히 막아냈다. 워커도 도쿄로 급히 날아가 이곳에 방어선을 치면 중공군 남하를 저지할 수 있다고 건의했는데 맥아더는 거부했다. 인천상륙작전이란 성공신화에 매몰돼선지 맥아더 판단이 흐려졌다.

저우언라이~마오쩌둥 비밀문서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인도교. [사진 인천중구청]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인도교. [사진 인천중구청]

유엔군 목표는 분쟁 종식이므로 침략군을 38선 밖으로 몰아내면 일단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그러니 38선을 넘더라도 적당한 곳에서 진격을 멈춰야 했다. 그곳이 정주~흥남 선이면 아주 바람직했다. 이 선과 압록강 사이에 완충지대가 형성돼 중공군 참전의 명분이 사라져서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낸 마오쩌둥(毛澤東)의 비밀 전보문에도 유엔군이 청천강 이북을 공격하지 않으면 중공군도 참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또 이 선은 미 합참이 맥아더의 북진을 우려해 멈추길 권유했던 선이고, 영국 정부도 유엔을 통해 제안했던 선이다.

맥아더가 정주~흥남 선에서 유엔군의 진격을 멈췄다면 지금쯤 한반도 운명도 크게 달라졌다. 일단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테니 전선은 정주~흥남 선에서 고착되었다. 또 미군 폭격으로 평북 강계의 한 동굴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던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없어 사실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면 북한 정부는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에서 힘을 발휘하는 조그만 정부로 쪼그라들게 된다. 이런 상태에선 소련과 중국도 전쟁을 도발한 김일성을 계속 도울 순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런 정부가 과연 지금까지 존속했겠는가.

장자가 말하는 ‘대붕의 지혜’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물론 맥아더 판단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 생각과 일치했다. 게다가 한국전이 발발하기 1년 전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본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대만으로 쫓겨났기에 자유세계 진영에선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렇더라도 맥아더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가 지닌 공자의 지혜를 소홀히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맥아더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친 거로 판명이 났다. 그렇다면 정주~흥남 선에서 진격을 멈췄다면 당시로선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쯤은 맥아더가 한반도에서 원했던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니 지도자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대붕(大鵬)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맥아더도 전함 맥킨리가 아닌 영종도 새우섬에서 마음을 비우고 대붕의 심정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봤다면 과유불급의 지혜를 실천하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워서 뒤늦게나마 상상해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