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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성수의 우리 과학 이야기

‘경술국치’ 84주년에 나온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소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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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1994년 8월 29일에 삼성전자는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 나라를 뺏긴 지 8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일본의 뒤꽁무니를 따라오다가 드디어 일본을 넘어섰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어 1994년 9월 6일에는 대한제국의 국기와 256M D램의 사진을 병치한 광고가 나왔다. 이후로 삼성은 계속해서 D램 기술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으며, 몇 년 전부터는 지속적 성장과 우위를 강조하는 ‘초격자 전략’이 거론되고 있다.

1983년 이병철 회장 도쿄 선언
파격적 조건에 해외 석학 유치
한국반도체 출신 인력도 큰 역할
40년 지난 지금은 초격차 전략

재미 과학자 강기동이 시작한 반도체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전하며 일간지에 낸 광고. [중앙포토]

1994년 8월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 256메가 D램 개발 성공을 전하며 일간지에 낸 광고. [중앙포토]

삼성그룹에서 반도체사업을 담당해 온 기업은 한국반도체(1974~78년), 삼성반도체(1978~80년), 삼성전자(1980~82년), 한국전자통신(1982년), 삼성반도체통신(1982~88년), 삼성전자(1988년 이후) 순으로 변천해 왔다. 한국반도체는 재미 과학자 강기동이 1974년 1월에 설립했으며, 같은 해 10월에 최첨단설비를 갖춘 부천공장을 준공했다. 삼성은 1974년 12월에 한국반도체의 주식 50%를 매입함으로써 반도체사업에 진출했고, 1977년 12월에 한국반도체를 완전 인수한 후 1978년 3월에 삼성반도체를 출범시켰다.

삼성이 D램 개발에 출사표를 낸 때는 삼성반도체통신 시절인 1983년이었다. 2월 8일에 당시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에 대대적으로 투자한다는 ‘도쿄(東京)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 이병철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칠십삼 세. 비록 인생의 만기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나이가 지긋한 기업가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이지 않은가.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사업을 직할 체제로 운영하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자세를 보였다. 삼성은 D램에 도전하면서 인재 영입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의 우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반도체 업계에서 실무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이 스카우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당시 연봉 2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제시되었다고 한다.

‘밤 11시 회의’ 6개월 만에 64K D램 개발

삼성은 1983년 5월부터 64K D램을 개발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조립생산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설계기술과 검사기술은 외국에서 도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삼성은 미국과 일본의 선진업체들에 접근했지만 모두 기술 이전에 인색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벤처기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가 선택됐다. 삼성은 효과적인 기술 이전을 위해 마이크론에서 기술연수를 받기로 했다. 유능한 신입사원을 중심으로 기술연수팀을 구성한 후 기술지식에서 정신 무장에 이르는 사전 교육을 했다. 당시에 삼성은 64K D램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특별 훈련으로 ‘64㎞ 행군’을 실시하기도 했다. 저녁을 먹은 후 무박 2일 동안 실시된 이 행군은 산을 넘고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갖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훈련이었다. 행군 도중에 꺼낸 도시락에는 D램 개발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편지 한 통이 있었다고 한다.

삼성은 마이크론으로부터 64K D램 칩을 제공받은 후 재현하는 작업을 했다. 그것은 완제품을 사다가 이를 분해해 해석함으로써 기술을 익히는 방법으로 흔히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역공학)’으로 불린다. 이런 과정에서 제대로 된 생산조건을 확립하고 불량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수반됐다.

당시 개발팀은 효과적인 기술학습을 위해 ‘일레븐 미팅’을 개최하기도 했다.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다가 밤 11시에 모여 당일의 성과를 점검하면서 다음날 진행시켜야 할 부분을 조정했던 것이다. 결국 삼성은 착수 6개월만인 1983년 11월에 64K D램의 개발을 완료했다.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한 국가가 됐다. 이처럼 삼성의 64K D램 개발은 최고경영진의 의지와 지원, 우수 인재의 유치, 해외 기술의 도입, 개발팀의 엄청난 노력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조연 있어야 주연 빛나는 법

그렇다면 부천공장의 기술인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삼성이 새롭게 선발한 요원도 있었지만 한국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인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강기동 사장을 비롯한 관리직은 삼성반도체가 출범한 후 하나둘씩 회사를 떠났지만, 한국반도체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운전공(operator)과 기술공(technician)은 대부분 삼성에서 자신의 경력을 이어갔다. 그들은 이미 반도체에 관한 작업절차에 숙달돼 있었으므로 D램 공정을 안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삼성의 공식 기록에는 이런 사람들의 기여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작년에 발간된 임형규의 『히든 히어로스』는 해외 영입 인재, 신입 엔지니어와 함께 부천 출신 인력이 삼성 반도체 굴기의 주축이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제 삼성이 64K D램을 개발한 지도 40년이 지났다. 불혹의 나이인 만큼 보다 성숙한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주연은 삼성의 개발팀이지만, 한국반도체 출신의 조연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주연은 조연이 있어야 빛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조연 없는 주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