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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유배지서 일가 일으킨 이문건, 눈물과 콧물의 육아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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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유학자의 삶, 가족의 무게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을사년(1545) 9월 6일, 큰형의 아들 이휘(李煇)가 역모죄로 거론되자 승지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사직서를 낸다. 그리고 밤을 틈타 장조카 집에 모셔진 부모님 신주를 자기 집으로 옮겨온다. 역모 죄인이라면 조상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에 신주를 옮겨오긴 했지만 사실 숙부인 자신의 생사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택현설(擇賢說, 인종의 후임으로 명종이 아닌 왕자 중에 현능한 자를 거론했다는 주장)에 휘말린 조카 이휘는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사에 처해지고 처자식은 노비로, 삼촌과 사촌은 유배형을 받는다. 이른바 을사사화의 연좌에 걸린 것이다.

조카 역모 혐의로 22년 귀양 생활
아픈 아들 내외 대신 손주 넷 챙겨

백척간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조상 숭모, 자녀 훈육 일일이 기록

아이들 공부하는 게 최고의 기쁨
손주의 술주정에 애간장 녹기도

유배 생활의 고군분투기 『묵재일기』

충북 괴산군에 있는 화암서원(花巖書院) 정경. 묵재 이문건, 퇴계 이황 등 조선 문신 넷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22년 지방 유림이 창건했다. [사진 괴산군청]

충북 괴산군에 있는 화암서원(花巖書院) 정경. 묵재 이문건, 퇴계 이황 등 조선 문신 넷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622년 지방 유림이 창건했다. [사진 괴산군청]

묵재(默齋) 이문건은 큰누나와 아내의 통곡 속에서 의금부 서리의 호송을 받으며 귀양길에 오른다. 호송 서리의 막말을 안으로 삭이며 11일 만에 배소(配所) 성주(星州)에 도착하는데, 다행히 동성(同姓)들이 모여 사는 고을이었다. 문관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쉰 나이 이문건이 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낯선 출발점에 선 것이다. 22년에 걸친 유배 생활에서 그가 남긴 16년 분량의 『묵재일기』는 나락에 떨어진 자신을 되살리기 위한 고군분투의 기록과 다름없다.

성(城) 밑에 배정된 이문건의 오두막 거처로 성주 이씨 동족과 인근 고을 수령으로 와 있는 관료계 인맥들이 각종 물품과 정성을 보내온다. 그는 방문객이 들고 온 식품과 보내온 물품을 꼼꼼히 기록했다. 감 몇 개 석류 몇 알까지, 아무리 혼자 보는 일기장이라지만 문관의 체모를 구기는가 싶은데,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이자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겠다.

충북 괴산군에 있는 이문건 묘역. [사진 괴산군청]

충북 괴산군에 있는 이문건 묘역. [사진 괴산군청]

한편 아내 김돈이(1497~1566)는 남편이 떠난 서울 집에서 반년 남짓 더 머물다 친정이 있는 괴산으로 옮겨간다. 다행히 그곳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내의 상속분이 있었다. 괴산에서 반년 남짓 머물던 아내는 상처한 아들 온(熅·1518~1557)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부자유민 이문건은 자식의 혼사 정보를 아내의 편지로 대신하며 안타까워한다. 아들은 어릴 때 앓은 천연두의 후유증으로 행동이 굼뜨고 고질병을 안고 사는 처지로 부모의 하나 남은 자식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다. 김돈이는 아들 내외를 대동하고 남편의 처소로 이주해 오는데, 유배 1년 만의 상봉이다. “며느리는 사랑스럽고, 자신을 닮아 어리석고 과묵한 아들은 우습다. 그리고 앙상하게 야윈 아내가 말을 타고 온 게 기이하다.”(1546년 10월 3일)

육아 책임진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문건과 부인 안동 김씨의 부부묘에서 출토된 철릭. 철릭은 비상시에 입는 관복의 하나다. [사진 문화재청]

이문건과 부인 안동 김씨의 부부묘에서 출토된 철릭. 철릭은 비상시에 입는 관복의 하나다. [사진 문화재청]

이문건의 네 가족은 1년 만에 첫 손주 숙희를 얻고 2년 터울로 손녀 숙복과 손자 숙길을 얻는다. 그 사이에 셋집을 벗어나 위채와 아래채로 이루어진 집을 마련했다. 어른 목숨도 경각에 달린 전염병 만연의 시대에 갓 태어난 여린 생명을 성년으로 길러낸다는 것은 정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둘째 숙복이 이질에 걸려 앓아눕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의술을 총동원하여 손녀에게 집중한다. “오늘도 먹지 않고 힘없이 누워 있는 숙복이 안타깝다.”(1551년 7월 17일) “숙복이 일어나 앉아 먹을 것을 찾으니 기쁘다.”(1551년 7월 21일)

이문건이 아내 김돈이의 일생을 백자에 기록한 묘지명. [사진 충북대 박물관]

이문건이 아내 김돈이의 일생을 백자에 기록한 묘지명. [사진 충북대 박물관]

숙복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데, 할아버지는 세 살배기 손녀의 관(棺)을 괴산으로 지고 가 그곳에 매장토록 한다. 자신이 해배(解配)되면 정착할 괴산에 죽은 손녀를 먼저 보낸 것인데, 잠시 머물다 떠난 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숙희와 숙길 또한 번갈아 열과 설사를 하며 할아버지의 애간장을 태우는 가운데, 막내 손녀 숙녀가 태어난다.

이 가족에서 육아와 교육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몫이었다. 아들은 수시로 병이 도져 자기 한 몸 간수도 어렵다가 막내 숙녀가 두 살 때 죽었고, 며느리 또한 영민하지는 못했다. 이문건 부부는 며느리가 숙희를 자주 때려 울리는 문제로 속이 상한다. “며느리가 화를 내며 또 숙희 머리를 때렸다. 내 마음이 편치 않아 잠시 앉았다가 바로 나와버렸다.”(1554년 10월 11일) 여섯 살이 된 숙희가 공부하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기특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숙희가 요즘 6갑과 28수 등의 숫자를 익혀 외웠다.”(1555년 1월 11일) “숙희가 어제저녁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며 옆에다 언문 토를 달아달라고 했다.”(1556년 9월 14일)

『양아록』 저술, “가문을 잇게 됐다”

이문건이 유배 생활의 일상사를 기록한 『묵재일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이문건이 유배 생활의 일상사를 기록한 『묵재일기』.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뭐라 해도 이문건 최고의 날은 손자 숙길이 태어났을 때이다. 그는 기쁨에 겨워 술을 따라 스스로를 경축하며 장문의 시를 지었다. “천리 생생(生生)의 이치는 무궁하다더니 어리석은 아들이 자식을 얻어 가문을 잇게 되었다.”(『양아록』) 숙길의 돌잔치 풍경은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책과 붓·먹·벼루, 활과 도장, 쌀·실·떡 등을 방 가운데 대자리에 늘어놓고, 아기가 기어와 물품을 잡는데 그 순서와 머무는 시간, 동작까지 할아버지는 일일이 기록했다.(1552년 1월 5일) 명예와 부(富)와 장수, 세속의 이 귀한 것들을 아픈 아들 대신에 손자 숙길이 누리기를 할아버지는 염원한다. 육아일기 『양아록』은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이문건이 손자들을 키우며 겪은 일을 적은 『양아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이문건이 손자들을 키우며 겪은 일을 적은 『양아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수령은 물론 인근의 명사들과 벗으로 지내는 할아버지의 비호 아래 손자 숙길의 소년시대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그런데 숙길은 공부보다 놀기를 좋아하고, 13살에 벌써 술맛을 알고 만취해서 해롱거리는 날이 많았다. “아이로 누가 날마다 부지런히 글을 읽겠는가. 다만 네가 모든 것을 소중히 하길 바란다. 꾸짖고 나무라지만 뉘우치는 기색은커녕 틈만 나면 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양아록』)

숙길이 술 냄새를 풍기며 취해서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회초리를 가져다 누이동생과 누나, 어미와 할머니에게 차례대로 10대씩 때리게 하고, 이어서 자신은 20대를 때려 경고한다.(1563년 10월 16일) 가족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숙길은 “매번 목마른 것처럼 술을 생각하고” 할아버지는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탄식한다.

늘어난 가족, 조상 제사만 20여 건

이문건이 1545년 유배지인 경북 성주에서 직계 가족만 수록한 족보.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이문건이 1545년 유배지인 경북 성주에서 직계 가족만 수록한 족보.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청]

한편 열다섯 살 숙희는 조부모가 점지한 서울 사람 정섭과 혼인하여 풍습대로 처변(妻邊)에 머물며 두 딸을 낳을 때까지 할아버지의 그늘에서 살아간다. 죽은 두 형의 손자이자 아비도 없는 수기와 천택(현배)이 유배객 종조부의 그늘로 들어오면서 가족은 하나둘 늘어난다. 게다가 그는 부모의 기제와 생신제를 비롯 20여 건의 조상 제사를 지낸다. 조부모와 외조부모, 증조부모, 양증조부모, 처부모 등의 제사인데, 제물을 올리기도 하고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으로 임하기도 한다. 유학자 이문건은 살아있는 후손과 이미 죽은 조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생관을 갖고 있다.

해배(解配)의 기별이 간절하지만 그에게는 당장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혈족과 노비를 포함한 많은 식구의 생존 값을 벌기 위해 이문건은 쌓아온 지식과 역량을 백분 활용한다. 수령의 바둑 상대가 되어 각종 민원을 청탁하고, 유의(儒醫)급의 의술로 처방전을 써 주며, 서예로 이름을 날린 만큼 글씨를 제공하기도 한다. 각 고을에 산재한 수령들도 오가며 이 억울한 유배객의 살림을 보태주었다.

50년 함께한 아내의 일생, 백자에 새겨

이문건은 서울의 가옥을 손자가 아닌 손녀 숙희 부부에게 물려준다. 아내 김돈이의 뜻이었다. 한번은 점술가를 불러와 손녀들의 사주를 보이는데, 숙희는 평탄하게 잘 살고 숙녀도 부유하게 살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 온 사람에게 술을 대접하고 종이와 먹을 두둑하게 선물로 준다.(1561년 9월 12일)

과연 막내 손녀 숙녀(1555~1608)는 남편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이 충절의 역사 인물이 되었고, 두 아들 인급과 효급도 벼슬길에 들었다. 한때 할아버지의 속을 태웠던 숙길도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다.

50년을 함께한 아내 김돈이가 세상을 떠나자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싫어했으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가릴 줄 알았다”(‘숙부인김씨묘지명’)며 아내의 일생을 백자에 새겨 묘비 밑에 묻는다.

“아내를 땅에 묻은 후 신주를 안고 돌아와 죽청에 안치하고 초우제를 지냈다.” 1567년 2월 16일, 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리고 두 달 후 고단했지만 숭고한 삶, 이문건도 끝내 해배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세상과 하직한다. 그 삶의 기록은 개인의 역사이지만 조선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