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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보다 달콤한 설탕, 조선인 입맛·체형까지 바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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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호 26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수입 식료품 대중화

조선시대 종로 시전거리에 있었던 잡화점 모습. 여기서 알사탕도 팔았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종로 시전거리에 있었던 잡화점 모습. 여기서 알사탕도 팔았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단맛하면 꿀이지만 꿀보다 더 단 게 설탕이다. 예부터 우리도 차조와 찹쌀로 맥아당을 만들어 먹었다. 하지만 맥아당보다 사탕수수를 정제한 설탕이 더 달았는데, 불행히도 조선에는 사탕수수가 나지 않았다. 조선에서 단맛은 꿀과 엿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 소량 수입하는 설탕은 궁중과 상류층을 위한 ‘약재’에 불과했다. 그러다 1890년대에 들어서 종로의 잡화점에서 수입 설탕으로 만든 사탕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상점이나 잡화상 하면 우선 종로다. 1887년경 일본인들이 지금 충무로인 진고개를 중심으로 수입품 상점을 열었다. 이에 질세라 조선인들은 종로 대광교에서 남대문까지 수입품, 외래품을 취급하는 ‘모던 상점’을 연다. 박문서관, 천응상점 등이 대표적인 종로의 조선인 상점이었다. 이곳에서 사탕을 비롯한 근대 식료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설탕 녹여 얼린 아이스케키 인기 폭발

1890년대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상점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종각 옆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큰 상점에 한번 가 보았다…상점에 있는 주요 상품은 아래와 같다. 흰 면제품 옷감, 짚신, 삿갓…자홍색, 진홍색, 초록색 등 역겨운 염료를 물들인 알사탕, 말린 미역’

1930년대에 등장한 아이스케키 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30년대에 등장한 아이스케키 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이 색색으로 물들인 알사탕이다. 당시에 ‘꿀보다 단 게 사탕’이라는 동요도 있었을 정도로 새로운 맛의 세계를 선사한 설탕의 대표선수였다. 설탕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1910~20년대 요리책인 『반찬등속』, 『부인필지』 등에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5.1%였지만 1930년대에는 16.5%로 올라가고, 1940년대에는 31.9%로 치솟는다.

그러나 설탕은 눈물이 담긴 상품이었다. ‘설탕 한 근과 눈물 한 되’라는 제목의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그렇다. 1930년 8월 27일자 『중외일보』에는 “(중국에서) 신의주로 인력거를 타고 건너오려 할 때는 철교 근방에서 팔 구세 십여 세 된 소녀들이 십여 명씩 열을 지어 종이에 싼 뭉치 한 개씩을 손에 들고 ‘좀 건너다주서요! 아무 일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애원적으로 연발하면서 따라온다. 처음은 기자도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듣고 보니 그들의 손에 든 뭉치는 사탕(砂糖)봉지요 그들의 요구는 강 건너까지 가져다달라는 부탁이다.” 설탕 밀수에 나선 어린아이들의 고달픈 모습이었다.

1921년 평양에 일본이 독점적인 설탕 공장을 설립한다. 이 공장은 대만에서 수입한 사탕수수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지에서 재배한 사탕무를 원료로 삼았다. 공장의 등장으로 조선에서 ‘설탕 문명’이 펼쳐진다. 상류 식자층은 아예 ‘설탕 문명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설탕이란 서구문명을 상징하는 대표적 상품이었기에 한 나라의 설탕소비량이 문명의 수준을 드러낸다는  주장을 펼쳤다. 상류층에서는 ‘생활개선운동’이란 명목으로 위생과 영양을 위해 가정용 요리에도 설탕을 넣도록 적극 권장했다.

제일제당이 만든 선물용 설탕 상자. 설탕은 한국인의 입맛과 체형까지 바꿔 놓았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제일제당이 만든 선물용 설탕 상자. 설탕은 한국인의 입맛과 체형까지 바꿔 놓았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물론 이런 선전에는 제당회사, 설탕 가공 식품업자, 식료품 상회 그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앞장섰다. 도시의 상류층 현모양처가 설탕을 요리에 넣는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사탕에 이어 인기를 끈 아이스케키는 1930년대 초부터 등장한다. 1932년에 처음으로 아이스케키 제조기계 신문광고가 등장한다. 아이스케키는 행상이 팔기도 하고 주문 받아 배달해 주기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주로 한밤중에 먹었다. 1937년에 갑자기 아이스케키가 엄청나게 유행한 이유는 그 해 여름의 기록적인 폭염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1937년 8월 21자에는 “금년은 예년에 보지 못하든 더위가 오래 동안 계속하여, 여름 장사들이 두둑이 한 몫” 보았으며 “그중에서 가장 고객의 수효를 많이 가진 아이스케키 장사들 중에는 백 개 혹은 이백 개씩 도매로 사서 자전거 행상을 하는 소매업자에게 팔기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확천금의 꿈도 잠시, 아이스케키는 여름철 전염병의 원흉임이 밝혀지며 철퇴를 맞는다. 조사결과 1㎖에 최대 730만여 마리의 세균이 검출되어 “청계천 물보다 더럽다”는 오명을 입고 금지식품으로 전락한다. 그렇다고 안 팔고 안 먹을 한국인이 아니기에 여름마다 아이스케키 행상과 단속하는 순사들의 숨바꼭질을 보며 사먹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단맛은 초콜릿이다. 아이스케키가 대중화에 주력했다면 초콜릿은 고급화 전략을 펼친다. 1927년 모리나가(森永) 광고는 맛도 영양도 아닌, 편지를 쓰는 신사 그림에 “사랑한다면”이라는 카피를 올린다. 요즘으로 치면 발렌타인 데이 식 마케팅이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여학생의 감상문을 올리고, 동요 현상모집을 통해 어린이의 입맛까지 노리는 광고 전략이었다.

이젠 ‘설탕 한 근은 땀 한 말’ 비만과 전쟁

모리나가 ‘밀크 초코레-토’의 일간지 광고.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모리나가 ‘밀크 초코레-토’의 일간지 광고.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하지만 모리나가의 ‘밀크 초코레-토’가 아니라도 이미 구한말부터 초콜릿은 조선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920년대 여성 배우이자 가수였던 이애리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자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초코레트”라고 했다. 심지어는 초콜릿 애호가를 ‘초코레잍당(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초콜릿 맛에 감동해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사람은 “조선의 과자는 빙사과, 밥풀강정, 백년을 가야 그 타령인 고사떡뿐”이라고 투덜거리며 조선의 과자도 발전해 새로운 맛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대에 들어서면서 그렇게 극성이던 설탕 식품 아이스케키와 밀크 초코레-토도 일제히 사그라진다. 입맛이 변해서가 아니라 전쟁 물자가 부족해진 일본이 설탕 소비를 줄이고자 말을 바꾼 것이다. 설탕은 “혈액을 산독화(散毒化)하고,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감퇴시키며… 뼈가 가늘어져 부러지기 쉽고, 충치를 생기게 하는” 해로운 식품이라고 건강을 위해 설탕 소비를 줄이라고 강요한다.

일제가 설탕 소비를 금지했다고 입맛이 변하는 건 아니다. 해방 후에는 단맛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에 정부는 수입을 대체하고자 국내 업자를 육성한다. 이를 통해 급성장하는 기업이 바로 삼성의 모체이자, 창업주 이병철이 세운 제일제당(지금의 CJ제일제당)이다. 정부는 제일제당에 파격적인 경제적 혜택과 수입 독점권을 주며 설탕 제조를 독려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국적으로 다방이 생겨나고 미군을 통한 서양문화의 급속한 전파로 설탕 소비량이 급증한 1953년 제일제당은 설탕생산을 시작한다. 당시 수입 설탕은 1근(0.6㎏)에 300환이었는데 제일제당은 이를 100환으로 정하면서 밀려오는 수요에 공장은 24시간 가동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음식에도 설탕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절 선물에는 설탕, 밀가루와 쌀, 계란, 돼지고기, 참기름이 주를 이뤘으나 그 중 설탕은 으뜸이었다. 심지어 손님이 찾아오면 설탕물을 대접했고, 복통이나 설사에 약 대신 따뜻한 설탕물을 마셨다.

근대 개화기에 한반도로 올라선 설탕으로 인해 우리 입맛은 완전히 바뀌었다. 가정에서는 설탕을 듬뿍 넣어 음식을 만드는 기혼 여성에게 ‘근대적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입히기도 했다. 설탕을 녹여 만든 사탕, 아이스케키 그리고 초콜릿 뿐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온 과자 센베이, 그리고 설탕을 녹여서 만든 눈깔사탕 ‘옥춘당’도 전통과자가 아니라 모두 설탕으로 조미한 ‘모던 식품’이다. 심지어 번데기나 정어리, 쥐치조차도 설탕으로 다시 조리하면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각종 먹거리와 결합한 설탕은 한국인의 입맛과 체형, 질병의 종류까지 바꿔 놓았다. 그리고 블랙홀처럼 모든 먹거리를 끌어들였다. 술을 비롯해 쌀과 밀가루 같은 탄수화물은 몸속에선 설탕이다. 결국 설탕은 비만과 당뇨의 원인이자 싸워 물리쳐야 할 ‘악마’로 변했다. ‘설탕 한 근과 눈물 한 되’였던 제국열강과의 설탕 전쟁은 이제 현대 한국인의 살과 혈액으로 전쟁터를 옮겼다. ‘설탕 한 근은 땀 한 말’…. 우리는 러닝머신 위에서 제국열강이 끌어들인 설탕과 뒤늦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김미혜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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