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11~15세기 ‘그레이트 짐바브웨’, 2만명 거주 메가시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서구가 숨겨온 아프리카 문명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지금 세계는 인종 편견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다. 서구와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자각과 인권 운동 덕분이다. 하지만 지구 전체 육지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그다지 없다. 고고학계에서도 동부 아프리카 케냐 일대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는 연구가 많을 뿐, 정작 그들의 문명에는 관심이 적다.

이유가 있다. 지난 150여년간 아프리카를 둘러싼 복잡한 사정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발견된 문명의 흔적을 은폐했다. 또 아프리카 여러 독립국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탓에 제대로 된 조사가 불가능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의 고대 문화다.

황금유물과 거대 성곽·가옥 출토
아랍·인도·중국까지 활발한 교역

“흑인 문명은 없었다” 서구의 억지
“17세기 포르투갈이 시작” 주장도

영화·소설 등 통해 ‘식민사관’ 확산
일제의 한국사 왜곡 논리와 닮아

클레오파트라는 흑인이었을까

아프리카 문명을 대표하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대형 석조물. 돌로 쌓은 성과 가옥이 남아 있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을 둘러보는 관광객. [신화=연합뉴스]

아프리카 문명을 대표하는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발견된 대형 석조물. 돌로 쌓은 성과 가옥이 남아 있다.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을 둘러보는 관광객. [신화=연합뉴스]

얼마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서 흑인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했다.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근대 서구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실제 역사적으로 이집트 남쪽에 순수 흑인으로 구성된 누비아 문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지중해를 끼고 근동과 주로 교류했으며, 클레오파트라도 그리스(또는 마케도니아)에서 온 사람이다. 이집트 측에서도 자신들을 흑인과 동일시하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논쟁 이면에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은 미개 원시사회에서만 살았을 것이라는 서구의 편견이 숨어 있다. 어드벤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 도시와 황금 유물이 없었을 것이라는 오해다.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일 가능성은 적지만 아프리카 곳곳에서 흑인들이 만든 문명의 흔적이 19세기 중반 이래로 적잖이 발견됐다. ‘짐바브웨 문명’이 단적인 본보기다.

고대 문명의 이름을 딴 짐바브웨

짐바브웨 유적에서 출토된 새 조각품. 짐바브웨 국기의 모티브가 됐다. [사진 브리티시 뮤지엄]

짐바브웨 유적에서 출토된 새 조각품. 짐바브웨 국기의 모티브가 됐다. [사진 브리티시 뮤지엄]

짐바브웨는 초현실적인 하이퍼플레이션으로 유명했다. ‘100조 달러’ 지폐도 발행한 적도 있다. 그들의 경제적인 불행은 오랜 식민지 역사와 관련 있다. 짐바브웨는 1923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다. 이 지역을 개발한 백인 탐험가 세실 로즈(1853~1902)의 이름을 따서 ‘남로디지아’로 불렸다. 2차 대전 이후 1965년에 독립했지만, 인구의 3%밖에 안 되는 백인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백인 위주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강하게 저항하며 1980년 짐바브웨로 독립했다.

‘짐바브웨’ 이름은 이 지역에 11~16세기 존재했던 고대 문명 유적지인 ‘그레이트 짐바브웨’에서 따왔다. 짐바브웨에서 문명이 꽃피기 시작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소를 키워서 마을을 만들고 해안을 따라 무역을 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그 최초 흔적인 마풍구브에 유적에서는 화려한 황금 유물과 돌로 쌓은 성과 건물이 잇달아 발견됐다. 특히 황금 코뿔소는 짐바브웨 문명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이후 11~15세기 문명의 중심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으로 옮겨갔다. 짐바브웨라는 말 자체가 이 지역 원주민의 말로 ‘돌의 집’이라는 뜻이다. 풍납토성의 2배 크기인 80헥타르 내에 돌로 만든 성과 가옥이 확인됐다. 최대 2만여 명이 살았다고 하니 세계 어느 문명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마풍구브에와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1973년과 1986년에 각각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짐바브웨 문명의 원동력은 무역이었다. 주변의 풍부한 황금을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통해 아랍, 인도, 나아가 중국까지 수출했다.

미개한 흑인, 우월한 백인 이분법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 짐바브웨의 지독한 인플레이션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피디아]

100조 짐바브웨 달러 지폐. 짐바브웨의 지독한 인플레이션을 보여준다. [사진 위키피디아]

국가 이름을 ‘로디지아’에서 짐바브웨로 바꾼 데도 이유가 있다. 19세기 말 짐바브웨 유적이 발견된 이래 백인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을 일군 사람들이 ‘미개’한 흑인이 아니라 ‘우월한’ 백인이라는 왜곡된 주장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미 일부 양심적인 학자들이 현지 주민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인 우월정책 ‘아파르트헤이트’가 주도하던 1980년대 이전까지 짐바브웨 문명의 발굴 자료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역사 교과서에도 남아프리카에서 문명이 시작된 것은 1652년에 이 지역에 도착한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소수 백인 정권의 통치를 위해 다수 흑인의 문명을 부정했다.

대중문화로 소비된 편견

11~14세기 짐바브웨 마풍구브에 유적에서 발견된 황금 코뿔소. [사진 월드히스토리 엔사이클로피디어]

11~14세기 짐바브웨 마풍구브에 유적에서 발견된 황금 코뿔소. [사진 월드히스토리 엔사이클로피디어]

논리와 이성을 내세우는 서구였지만 짐바브웨 문명은 고고학계에서도 철저히 외면됐다. 대신에 아프리카 문명의 주인공은 백인이라는 식의 소설과 영화가 널리 유행했다. 19세기 말 영국 작가 헨리 해거드가 발표한 일련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탐험가 주인공이 아프리카 밀림을 헤매다가 황금문명을 발견했는데, 아름다운 백인 여왕이 흑인을 다스리고 있다는 식이다. 솔로몬왕에게 황금을 바친 시바의 여왕(현재의 아라비아 남부나 에티오피아로 추정)이 변형돼 전해진 꼴이다.

이런 모험담은 서양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프리카 곳곳을 경쟁적으로 식민지로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지금의 할리우드 어드벤처 영화도 그렇다. 아프리카 보물을 찾아 탐험하는 주인공은 백인이고 흑인은 대부분 악역이나 희생자로 나온다. 이런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흑인은 어떤 문명도 이룩하지 못했다는 편견이 굳어졌다.

중국이 주목한 아프리카 문명

짐바브웨

짐바브웨

서양이 감춰온 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을 주목한 나라는 중국이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8세기경부터 중국과 교류해 왔다. 중국에 아프리카의 존재를 알려준 것은 751년에 벌어진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였다. 당시 고선지의 당나라 군대가 아랍에 패하면서 2만 명의 포로가 잡혀갔다. 포로 중에 두환(杜環)이라는 사람이 이라크를 거쳐서 모로코까지도 다녀왔다. 책의 일부만 전해지는 그의 『경행기(經行記)』에는 에티오피아와 남부 아프리카 일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명나라의 환관 정화의 원정대가 아프리카 동해안을 방문하던 15세기까지 교역을 이어갔다. 아프리카의 많은 항구에서 발굴된 중국 도자기가 당시 상황을 알려준다. 현재 일대일로를 내세우는 중국은 그 논리 중 하나로 아프리카와의 옛 선린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독자 문명을 부인하는 서양의 틈새를 노려 아프리카와의 외교 정책에 이용한다. 아프리카까지 뻗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한 정당성을 서방 스스로 제공한 셈이다.

짐바브웨와 클레오파트라를 둘러싼 논쟁은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짐바브웨 문명은 아프리카의 토착 흑인이 세운 것으로 밝혀졌지만, 정작 본격적인 조사는 중단된 상태다. 지금 우리가 아는 짐바브웨 유물과 유적은 대부분 100여년 전 제국주의 시절에 발굴한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의 아픔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들도 식민지 시절 황금을 찾는 서양인들의 극심한 도굴로 심하게 파괴된 탓에 제대로 자료가 정리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래도 경제가 극도로 어려운 탓에 짐바브웨 정부에서 새로운 조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도 짐바브웨 문명을 알려주는 것은 약간의 황금 유물과 돌로 만든 건축뿐이다. 짐바브웨 문명의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짐바브웨의 아픔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소수의 백인이 짐바브웨의 역사를 왜곡한 방식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을 때에 내세운 논리와 비슷하다. 식민지 시절 우리나라의 무덤도 심하게 도굴됐다. 조선총독부는 고조선 대신에 한사군을, 가야와 신라 대신에 임나일본부를 강조했다. 한국인은 수준 높은 문명을 세울 수 없고 북방과 중국에서 우월한 문명이 스치듯 지나가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그간 식민지 시절의 편견을 많이 극복했다. 하지만 짐바브웨를 비롯한 아프리카 곳곳에 남겨진 수많은 문명의 흔적은 여전히 식민지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짐바브웨 문명이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또 다른 문화재 전쟁의 현장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