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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옥균의 야망과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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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일본 도쿄대 정문인 아카몽(赤門)을 나와 오른쪽으로 돈 뒤 두 블록쯤 가면 쿠마고미조(駒込町)에 진조지(眞淨寺)라는 절이 있다. 현판이 없으면 여기가 절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옛집이다. 문을 들어서면 100여평 터에 무덤과 비석이 가득하다.

무덤 왼쪽으로 돌아가면 봉분도 없이 높이가 4m 정도 되는 자연석에 ‘朝鮮國金玉均君之墓’(조선국김옥균군지묘)라 쓴 비석이 서 있다. 그 묘비 왼편으로 ‘甲斐軍治君之墓’(갑비군치군지묘)라는 여윈 비석이 있다.

신영웅전

신영웅전

김옥균(1851~1894) 비석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위를 쳐다보면 예리하게 머리가 잘려나간 것이 보인다. 주지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때 폭격을 맞았기 때문이라지만, 폭격으로 부서진 모습이 아니다. 비석 밑동에 돌덩이가 묻혀 있는데 흙과 풀을 헤치고 보면 ‘大’ 자가 역력하다.

가이 군지(甲斐軍治)는 일본을 전전하던 김옥균이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洪鍾宇)의 총탄에 숨질 때까지 따라다녔다. 나가사키 출신으로 서울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다 김옥균을 만나 평생을 헌신했다.

김옥균의 시신이 서울 양화진으로 옮겨져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자 그는 애인 오야부 마사코(大藪雅子)와 함께 모발과 옷가지를 수습했다. 데라다 후쿠주(寺田福壽) 주지의 도움으로 진조지에 매장하고 ‘大朝鮮國金玉均君之墓’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일본 우익이 ‘大朝鮮’이라는 비명을 용납할 수 없다며 ‘大’자를 잘라내 땅에 묻었다. 가이 군지의 유언에 따라 김옥균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다.

비석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大’자를 잘라낸 것은 야속하지만, 버리지 않고 살짝 묻어둔 마음이 고맙다. 무엇보다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던 김옥균의 야망과 좌절에 대한 연민에 눈앞이 흐려진다. 정변에 실패하고 망명길에 오르며 “서른세 살, 아직 죽기는 아깝다”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