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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큰 더위의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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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제주에도 요 며칠간은 연일 무더위다. 태풍의 영향인지 어제는 바람이 일어 더위를 흔들어댔다. 바람이 들어선 대나무 숲은 마치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같았다. 그러나 요즘의 이런 더위는 처음 겪는 것 같다. 몸을 움직이면 이내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더위에 사람만 지치는 게 아니라 자연도 지친 기색이다. 나무도 화초도 작물도 더위에 시달려 기운이 빠진 듯하다. 나는 연신 찬물을 끼얹으며 몸의 열을 식히지만 자연의 몸에는 아무 때나 찬물을 끼얹어서는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올해 같은 더위는 처음 겪는 듯
자연이 힘들면 마음도 무거워
반딧불이 빛이 주는 작은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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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끄저께 대낮에 호스를 끌어다 화초에 물을 뿌리고 있었는데, 나의 서툰 짓을 지나가다 본 이웃집 사람이 내게 말했다. “지금 물 뿌리면 화초 죽어요. 다 익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날씨가 너무 더워서 꽃과 잎에 물을 뿌리면 그 물방울이 뜨거워져 꽃과 잎을 불에 익히는 것처럼 되고 마니 매우 해롭다는 것이었다. 물을 주려거든 아침 일찍 물을 주거나 해 떨어지고 난 후에 물을 주라고 일러주었다. 하마터면 화초들을 다 잡을 뻔했다며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그날 저녁 무렵에 화초들 뿌리에 맑고 차가운 물을 대주었다.

내가 쓴 졸시 ‘동근(同根)’이라는 시가 있다. ‘대지가 가물어 사람도 가물어요/ 나는 대지의 작은 풀꽃/ 흥얼거리는 실개천/ 대지에 먹을 물이 모자라니/ 나는 암석 같아요.’

자연이 가뭄에 시달리면 사람도 가뭄을 겪는다. 생활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가뭄이 든다. 가뭄이 들면 자애(慈愛)가 사라지기 쉽다. 장마와 태풍을 겪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연이 겪는 일을 사람도 생활에서, 또 마음에서 그대로 겪는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뿌리에 의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작은 풀꽃과 다를 바 없고, 실개천과 다를 바 없어서 자연이 가물면 사람의 생활과 마음도 돌멩이처럼 바위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큰 더위에는 더위를 피해 손을 놓고 좀 쉬기도 해야 할 테다. 내 사는 시골 동네에 어르신 두 분이 사시는 집이 있다. 어느 날 낮에 그 집 앞을 지나가는데 대를 엮어 늘어뜨린 발이 보였고, 그 발을 넘어 유행가 소리가 골목까지 흘러나왔다. 그 풍경은 이 무더위를 잘 넘기는 어떤 좋은 수가 아닐까 싶었고, 또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 집은 여름밤이면 동네에서 가장 먼저 불을 끄는 집이기도 했다. 창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고, 캄캄한 집 안쪽으로부터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말을 나누는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그 집의 밤 풍경도 어떤 안식을 안겨주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 집은 내가 호되게 겪는 큰 더위를 모르고 사는 집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그 어르신들은 지혜가 있으시고 또 마음을 느긋하게 쓰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그 집이 시원한 그늘을 잘 키운 집처럼 느껴졌다.

나는 큰 더위의 시간을 살면서 두 가지를 문득 떠올렸는데, 그 하나는 돌로 만든 수곽이었다. 절에 가서 보게 되는 이 돌로 만든 수곽에는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 돌통을 채우고, 다 채운 후에는 넘쳐 흘러내려간다. 물소리가 끊이지 않을뿐더러 물소리는 격렬하지 않고 급하지 않다. 제 몸인 수곽에 더 많은 물을 가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받아들이되 가득 차면 내보낸다. 이 돌 수곽이 왜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돌 수곽처럼 이즈음을 산다면 덜 지치게 되고 마음에서 자애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둥글게 모은 두 손바닥 안에 든 반딧불이의 빛이었다. 이것을 떠올린 것은 얼마 전 영화 ‘클래식’을 다시 보고나서의 일이었다. 영화에는 남녀 두 주인공이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에 갔다가 만나선 나무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때 남자 주인공이 물가를 날고 있는 반딧불이를 잡아 여자 주인공에게 주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 주인공의 두 손안에서 빛을 내던 반딧불이는 이내 여자 주인공의 두 손안에서 빛을 냈다. 아름다운 여름밤의 풍경이었다.

청춘의 연인들 사이의 순수한 사랑은 이 영화에 인용된 괴테의 시를 통해서도 전달된다. 그 문장은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였다. 괴테의 시 ‘연인 곁에서’의 일부였다. 두 주인공이 손으로 소중하게 감싼 반딧불이의 빛은 치장하지 않은, 화려하게 수식하지 않은, 수수한 사랑의 빛이 아닐까 싶었다. 동시에 이 반딧불이의 빛이 뜻하는 것 또한 수곽의 물이 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큰 더위도, 큰바람도, 큰비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생활과 마음이 덜 다치기를, 자애의 빛이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