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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공원~동대문 20㎞, 민본과 소통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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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길, 그 유구한 매혹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뉴욕타임스는 지난 6월 25일 서울의 한양도성 길을 세계 도시 안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 7개 중 하나로 선정했다. 이 길에서 뉴욕타임스가 주목한 구간은 사직공원 뒤편에서 시작해 동대문으로 끝나는 20㎞의 성곽길이다. 이 길은 인왕산으로 올라가 청와대 뒤편인 백악산에서 와룡공원을 거쳐 성북동을 통과해 낙산을 지나서 동대문으로 떨어진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성곽길을 걸으면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 서울 도심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한다.

NYT ‘세계 도시에서 걷고 싶은 길’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6시간 산행

경복·창덕·창경·경희궁 정문의 ‘화’
‘백성과 나라를 위하여’ 마음 담아

인왕·백악·낙산 안팎 이어주는 ‘문’
길마다 다른 풍경, 지루할 틈 없어

선비들 자취 따르며 서울을 한눈에

백악산에서 삼청동으로 내려오다 백악곡성에서 본 서울 시내 모습. 가운데 약간 오른쪽으로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백악산에서 삼청동으로 내려오다 백악곡성에서 본 서울 시내 모습. 가운데 약간 오른쪽으로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나머지는 프랑스 파리의 꽃이 가득한 녹색 정원길,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역사의 흔적이 있는 둘레길, 모로코 마라케쉬의 거미줄처럼 뻗은 골목길, 호주 시드니의 바다 위 도시를 한눈에 바라보는 길,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흑인들 삶을 기억하는 길, 브라질 리우 해변의 모래사장 길이다. 흥미로운 건 이 도시들이 전 세계에서 고루 선정됐다는 사실이다. 파리는 서유럽, 자다르는 동유럽, 마라케쉬는 아프리카, 시드니는 대양주, 세인트루이스는 북미, 리오는 남미에서 각각 선정됐다. 그러니 서울은 아시아의 도시 길을 대표하는 셈이다.

서울 성곽길을 따라 혜화문 쪽으로 가면서 보이는 성북동 주택가. 멀리에 돈암동 아파트 단지와 불암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서울 성곽길을 따라 혜화문 쪽으로 가면서 보이는 성북동 주택가. 멀리에 돈암동 아파트 단지와 불암산이 보인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그런데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여타 도시 길이 아무리 훌륭해도 한국인이어선지 한양도성 길이 으뜸이라 여겨진다. 일단 길이에서 비교되지 않는다. 20㎞에 이르는 한양도성 길을 걸으려면 최소한 6시간이 걸린다. 산길이 많아서 평지를 걸을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다. 또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는 구불구불하게 걸어서 위치에 따라 경관이 자주 변하므로 옆길로 새고 싶은 유혹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이 길을 걷게 되면 6시간이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또 서쪽의 인왕산, 북쪽의 백악산, 동쪽의 낙산을 오르게 된다. 그래서 세 방향에서 서울을 바라볼 수 있는데 여기에 남산까지 오르면 시내를 사방에서 모두 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내 중심에서 떨어진 산의 거리도 서로 달라서 원근감을 갖고 시내를 감상할 수 있다. 그중에 인왕산이 가장 가까이에 있어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이 눈앞에 펼쳐진다. 백악산에선 광화문 광장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낙산에선 성 밖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와 저 멀리 북악산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걸어온 성곽길을 추적할 수 있다. 그래서 백악산에서 와룡(臥龍) 공원으로 이어지는 산의 모습이 어째서 누운(臥) 용(龍)처럼 보이는지 안다.

노자가 강요한 문(門)의 중요성

밤에 본 한양성곽.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밤에 본 한양성곽.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그런데 성곽이 있으면 문이 있게 마련이다. 성곽은 외부로부터 안을 보호하므로 이쪽과 저쪽을 어쩔 수 없이 가른다. 그래서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 이루어지므로 문을 만들어서 사람이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노자도 이런 관점에서 문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도덕경』 1장에서 유(有)와 무(無)가 이름을 달리해도 같은 하나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현(玄)의 개념을 제시한 뒤 문(門)의 개념으로 보충해 설명한다.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즉 ‘현 하고 또 현 하니 많은 오묘함이 깃든 문이다’가 그것인데 노자는 문을 통해서 유와 무가 서로 통한다는 걸 말해준다.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 현판.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북대문에 해당하는 숙정문 현판.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뉴욕타임스가 추천한 한양도성 길 구간을 걸으면 창의문(彰義門), 숙정문(肅靖門), 혜화문(惠化門), 흥인지문(興仁之門)을 차례로 만난다. 창의문과 혜화문은 북소문과 동소문에 해당하므로 광희문만 제외하곤 서울에 남아 있는 사소문을 모두 접한다. 또 숙정문과 흥인지문은 북대문과 동대문이므로 숭례문(남대문)만 빼곤 사대문을 모두 접한다. 돈의문(서대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서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건 역사의 숨결을 느끼려는 사람에겐 큰 축복이다. 게다가 이 문들의 이름에서 옛 서울 사람들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 어째서인가?

사대문 이름에 담긴 오행설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한양 도성 길.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소나무 사이를 지나는 한양 도성 길.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동대문의 정식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인데 인(仁)을 흥하게(興) 하는 문이란 뜻이다.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대문 이름이 오행설에 따라 서로 연결됐음을 알아야 한다. 오행설에 따르면 우주 자연의 근본원리는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로 설명되는데 동아시아인이 오랫동안 세상을 이해해온 방식이다.

그런데 서양력이 도입되면서 일(日)과 월(月)이 추가돼 일주일이 되었다. 한편 오행설의 기본 단위는 다섯이라 오일장도 이래서 생겨났다. 그래서 닷새가 기후(氣候)가 되고, 세 개 기후가 모여 절기(節氣)가 되고, 여섯 개 절기가 모여 계절(季節)이 된다. 계절-절기-기후의 이런 연결이 음력의 구성원리이다.

마찬가지로 방향이나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도 오행설을 따른다. 그래서 ‘목’은 동쪽으로 인(仁)을, ‘금’은 서쪽으로 의(義)를, ‘화’는 남쪽으로 예(禮)를, ‘수’는 북쪽으로 지(智)를, ‘토’는 중앙으로 신(信)을 의미한다. 그래서 동대문 이름에는 인(어짊)이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서대문 이름에는 의가 들어가야 해 돈의문(敦義門), 즉 의로움을 도탑게 하는 문이 되었고, 남대문 이름에는 예가 들어가야 해 숭례문(崇禮門), 즉 예의를 숭상하는 문이 되었고, 북대문 이름에는 지가 들어가야 해 숙정문, 즉 지혜의 드러냄을 엄숙히 하는 문이 되었다.

숙정문에 ‘정(靖)’이 들어간 까닭

와룡공원 인근 성곽길을 걷는 시민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와룡공원 인근 성곽길을 걷는 시민들. [사진 김정탁, 중앙포토]

그런데 숙정문에선 ‘지’가 없고 어째서 그 자리에 ‘정(靖)’이 들어갔을까? 그건 우리들의 조상이 지혜에 대해선 겸손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믿어서다. 그래서 지혜는 드러내선 안 되는 거라 이를 은유하는 ‘정(靖)’을 대신 사용했다. ‘정’에는 칼끝이란 의미가 있는데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붓이 뾰족해 마치 칼끝과 같아서 지(知)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신(信)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신각(普信閣), 즉 믿음을 널리 미치게 하는 종각을 시내 중앙에 설치했다. 오행설에 따라 사대문과 종각의 위치를 이처럼 정한 뒤 이에 맞게끔 이름을 지었다.

또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을 가로지르는 지점에 있다. 이 문은 인왕산에서 도성길에 오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인데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자하란 자줏빛(紫) 노을(霞)인데 여기서 바라보는 석양의 자줏빛 노을이 아름다워서다. 그런데 이 일대 풍광이 개성의 명승지인 자하동과 비슷해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니 자하동도 석양일 땐 자줏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었던 것 같다. 한편 인조반정 때 서인이 주축이 된 반란군이 이 문을 통해 들어와 의로움(義)을 밝혔다(彰)고 해서 그 후 집권세력이 된 서인은 창의문이라 부르는 걸 고집했음에도 일반인은 여전히 자하문이라 불렀다.

숙정문을 지나 성북동으로 내려와서 낙산에 오르려면 혜화문을 만난다. 혜화란 은혜를 베풀게(惠) 된다(化)는 뜻인데 동소문이 어째서 그러한지 궁금하다. 그런데 시내 북쪽에 나란히 위치한 경복궁·창덕궁·의 정문 이름에 모두 화(化)가 들어있다는 데서 이런 궁금증도 풀린다.

광화문·돈화문·홍화문·흥화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경복(景福), 즉 큰 복이 광화문을 통과해 빛(光)이 돼(化) 만백성에게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돈화문은 창덕(昌德), 즉 창성할 덕이 돈화문을 통과해 두텁게(敦) 돼 오랫동안 베풀어지고, 홍화문은 창경(昌慶), 즉 창성할 경사로움이 홍화문을 통과해 넓게(弘) 돼 삼천리 방방곡곡에 퍼지고, 흥화문은 경희(慶熙), 즉 경사스러운 빛이 흥화문을 통과해 나라가 흥하게(興)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복·창덕·창경·경희는 표현만 다를 뿐 왕의 교지를 의미한다. 조선이 왕정국가라도 ‘백성을 위해서(for the people)’란 민본(民本)을 중요시하려 했던 건 궁궐 정문 이름에서도 잘 나타난다. 혜화도 마찬가지다.

한양도성 길은 훌륭한 경관에 더해 나라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문 이름에서 분명히 밝힐 뿐만 아니라 사람의 도리까지 언급한다. 나아가 이 문들의 색다른 이름은 우리들의 인문적 상상력까지 자극한다. 그러니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세계의 여타 도시 길이 아무리 빼어나도 한양도성 길만큼 인상적일 수 없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