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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화랑, 전시와 수집을 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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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우리나라에서 고미술이 아닌 동시대 미술품을 다루는 화랑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베트남 전쟁 특수, 중동 건설 붐 등으로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새로운 주거 형태로 아파트가 확산하면서다. 고급화한 취향에 어울리는 장식품이나, 수집 대상으로서의 미술품 수요가 급증했다. 1970년 현대화랑·명동화랑을 시작으로 인사동·관훈동 일대에는 30여 개 화랑이 들어서게 됐다.

한국화 현장 지킨 동산방 화랑
국가에 기증한 작품 전시 열려
국공립 미술관들의 ‘빈틈’ 채워

이용우, 산수(山水), 1930년대, 종이에 먹, 86.5x15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용우, 산수(山水), 1930년대, 종이에 먹, 86.5x15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61년부터 동산방표구사를 운영해 오던 박주환(1929~2020) 대표가 한국화(동양화) 전문화랑 동산방을 개관한 것은 1974년이었다.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 문화 정책으로 한국화가 주목받던 시기이자, 변관식·박노수·허백련 등 ‘동양화 6대가’들이 세상을 뜨면서 세대교체가 모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명동화랑의 ‘30대 오늘의 얼굴들전’(1971), 그로리치 화랑의 ‘동양화가 7인전’(1974) 등 화랑들은 화단의 공백을 메울 젊은 작가들을 발 빠르게 물색했다.

동산방화랑은 1976년 개관전으로 30·40대 작가들 위주로 ‘동양화가 중견작가 21인전’을 기획했다. 현대적 진경산수를 구현한 이열모·김동수·이영찬, 도시 풍경을 세련된 수묵에 담아낸 송수남·이철주, 수묵의 추상성을 실험했던 송영방·이규선, 문인화의 신경지를 개척한 홍석창 등 젊고 역량 있는 작가들의 다양한 경향을 아울렀다. 작가에게 10호 크기 (53×45.5㎝) 두 점씩을 출품할 것과 이 중 한 점은 화랑이 매입할 것을 알렸다. 당시 한 점당 50만원 정도였던 작품들이 매진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9년 오일 파동으로 경제가 요동치자 사람들의 관심은 값이 오를 대로 오른 동양화에서 서양화로 옮겨갔다. 이후 1980년 동산방에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이 열렸다. 민중미술을 탄압한 군사 정부 때문에 전시가 취소되자 동산방이 기꺼이 전시 공간을 내줬다.

1980년대 이후 동산방은 서양화·판화로 영역을 확장해갔지만, 그 중심은 한국화였다. 1985년 현대화랑과 합작으로 기획한 ‘청전과 소정전’은 이상범·변관식 두 대가의 작품을 망라해 비교한 첫 전시로,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미술시장에서 한국화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오늘까지도 동산방은 한국화 작가들을 변함없이 소개해 왔다.

화상이자 수장가였던 고(故) 박주환은 그가 평생 모은 미술품이 공공재로 쓰이길 희망했다. 그 뜻을 이어 아들 박우홍 현 동산방화랑 대표는 한국화 154점을 포함한 총 209점을 2021년, 2022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이 가운데 57인 작가의 작품 90여 점을 선별해 ‘동녘에서 거닐다: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을 열고 있다.(내년 2월12일까지)

근대기 작품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이용우의 ‘산수’(1930년대)다. 전통화법의 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동연사’를 조직했던 이용우는 먹의 농담을 통해 사실적 깊이 감을 더하는 한편, 지게에 땔감을 짊어진 농부와 삽살개를 그려 넣어 친근한 한국의 산야를 사생풍으로 구현했다. 현대작 가운데 이종상의 ‘남해즉흥’(1977), 이철주의 ‘세종로 풍경’(1979), 이열모의 ‘팔현리’(1983), 이영찬의 ‘구미정’(1992)은 실험정신이 잘 드러난 현대의 실경산수화다. 박주환 컬렉션의 또 다른 백미다.

동산방화랑 외에도, 2000년 가나아트센터가 서울시립미술관에 민중미술을 포함한 200점을, 2004년 갤러리 현대가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박수근 작품을 포함해 55점을 기증하는 등 화랑 기증품이 국공립미술관 수장고를 채우는 전통은 과거에도 있었다.

화랑은 동시대 미술을 가장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사적 공간임에도 때로는 지나친 상업성과 폐쇄성으로 부정적 측면이 부각됐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 국공립박물관의 전시공간이 미비하던 시절 동산방을 필두로 한 화랑들은 미술 현장에서 터득한 안목으로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함으로써 미술시장만이 아니라 현대미술사의 형성에도 역할을 했다. 전시와 발굴, 수집과 판매를 넘어 좋은 작품이 대중과 함께 향유되고 보존되기를 희망하는 보통 사람들의 바람이 화랑의 미술품 기증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음을 이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이주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