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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병천의 퍼스펙티브

압축 성장 한국형 경제 기적 뒤 ‘반기업 정서’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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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 대기업의 역사적 책임은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자본주의 이전’ 경제와 ‘자본주의 이후’ 경제에서 달라지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기업의 등장이다.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핵심(core)에 해당한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시대가 되면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한다.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시대가 되면 ‘친(親)기업 정서’가  확산한다.

자본주의 탄생 이래 대기업에 대한 반감과 호감은 역사적으로 공존했고, 시차를 두고 출렁거렸다. 한국의 경우, 서구와 구분되는 반기업 정서의 역사적 유래가 존재한다. 이 지점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한 단계 높은 사회적 통합을 달성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1969년 ‘닉슨 독트린’으로 박정희 정부 안보 위기감 고조
방위산업 육성과 수출 겨냥해 중화학공업 정책 드라이브
주저하는 대기업에 파격적 과세 혜택 부여하며 참여 유도
대기업, 계층사다리 복원과 사회통합 위해 더 적극 나서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1년 7월, 한국을 선진국으로 지정했다. 회원국 만장일치였다. 식민지의 경험이 있는 제3세계 국가 중 최초이고 유일한 경우다. 한국은 어떻게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다.

성장 중심에는 수출 - 중공업 전략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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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하나는 박정희 정부가 주도했던 ‘수출-중화학공업 중심 산업화 전략’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이건희로 상징되는 한국 기업인들의 ‘기업가 정신’이다. 박정희 정부의 국가주도 산업화와 민간 대기업의 기업가 정신은 서로 맞물려서 작동했다. 이 두 요소가 어울리며 한편으로는 ‘한국형 경제기적’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형 반기업 정서’를 만들었다.

한국형 경제기적과 한국형 반기업 정서가 어떻게 연결됐다는 말인가? 이를 알려면, 박정희 정부 시절 대기업의 성장과정을 알아야만 한다. 대기업과 관련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 정책은 크게 두 번의 변곡점을 겪었다.

첫번째 변곡점은 수출 노선의 채택이다. 채택 연도는 1964년이다. 이 노선의 채택으로 박정희 정부는 수출 기업에 대해 파격적인 수준의 금융 혜택을 제공한다. ‘무역금융’ 혹은 ‘수출금융’으로 불리는 정책이다.

〈표 1〉 김영옥 기자

〈표 1〉 김영옥 기자

〈표 1〉을 보자. 1966~72년의 기간 동안 일반 대출금리는 23.2%였다. 무역(수출)금융 금리는 6.1%였다. 무역금융 대비 일반대출의 금리 격차는 무려 17.1%포인트였다. 배율로 보면 3.8배였다. 수출 기업 중에는 대기업 비중이 중소기업보다 더 컸다. 결과적으로 ‘대기업을 더 많이’ 지원하게 된 셈이다.

닉슨 독트린이 부른 충격

둘째 변곡점은 중화학공업 노선의 채택이다. 채택 연도는 1973년이다. 당시 중화학공업은 선진국이나 하는 산업이었다. 저개발 국가는 경공업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으로 평가됐다.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 정책을 편 이유는 안보위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0년대 중후반에 걸쳐 강력한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에 직면한다. 닉슨 정부는 1969년에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골자는 ‘아시아가 공산주의 위협을 받더라도 우리는 간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972년 2월, 닉슨은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한국전쟁 기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로 지내다가 서로 화해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반전운동→닉슨 독트린→중국과의 데탕트 과정을 거치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전면 철수할 조짐을 보였다. 한국의 안보위기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자주 국방’을 추진했다. 자주 국방의 연장에서 방위산업 육성을 추진했다. 방위산업 육성에는 돈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차관 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빌려주는 나라가 없었다. 결국 차관 도입은 실패했다.

이런 난관을 맞아 당시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제1비서관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요지는 ▶모든 군사 무기는 조립과 분해가 가능하다 ▶한국 대기업들에게 방위 산업을 분담시킨다 ▶정부는 국방과학연구소를 통해 대기업이 생산한 부품에 대해 정밀한 품질관리를 실시한다 등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전시에는 방위산업, 평시에는 중화학공업’을 겨냥했다. 박정희 정부가 잘한 것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초점을 단지 자주 국방에만 맞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과도 연동했다. 한국 경제사에서 중화학공업은 ‘안보정책’이자 ‘경제성장 정책’이었다.

안보위기, 유신, 대기업의 결합

문제는 한국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방위산업도 중화학공업도 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일이었다는 점이다. 중화학공업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어야 했고, 성공 확률도 극히 희박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회수 기간도 지나치게 길었다. 불확실성은 매우 컸지만 기대 수익은 불투명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절반은 당근으로, 절반은 협박으로 대기업들에게 중화학공업(방위산업)을 관철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그림 1〉을 보면,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위해 대기업에 얼마나 강력한 세제 혜택을 줬는지 알 수 있다. 1973년 이후 중화학공업과 경공업에 대한 세율이 확 갈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화학공업은 법인의 유효한계세율이 20% 미만이었다. 반면 경공업은 50%대 수준이었다. 중화학공업은 대기업이 하는 사업이다. 경공업은 중소기업이 주류를 이룬다. 대기업에는 20% 미만의 세율이, 중소기업에는 50% 수준의 세율이 적용된 셈이다. 말하자면, 1000개 기업 중 950개의 중소기업에는 높은 과세를 하고, 그렇게 걷은 돈을 50개 대기업에 몰아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박정희 정부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 선언을 앞두고 1972년 10월에 유신을 선포했다. 즉, 중화학공업+파격적인 대기업 지원+유신 독재는 하나의 패키지였다.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반대편에는 중소기업 지원+대기업 특혜반대+유신 반대(민주화)의 패키지가 있었다.

한국의 반기업 정서가 왜 형성되었나고 물었지만, 정확하게는 ‘반(反) 대기업 정서’다.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이 유행하기 전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의미하는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경영’이 유행했다.

서구의 대기업 발전 역사와 한국 대기업 발전의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서구의 대기업은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없이 스스로 성장했다. 한국 대기업은 달랐다.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에 힘입어 성장했다. 게다가 성장 과정에 유신 독재가 결합되어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안보+독재+성장 동맹’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한국은 ‘기적의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한국 대기업은 서구와 달리 ‘기업의 역사적 책임’(Corporate Historical Responsibility, CHR)이 있다고 봐야 한다.

CHR 경영의 필요성

대기업의 역사적 책임을 환기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현재 대한민국에 닥친 난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다. 한국 사회는 미중 패권, 글로벌밸류체인(GVC)의 급진적 재편, 급진적인 에너지 전환, 인구구조의 극단적 역전이라는 4대 위기와 마주하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위기다. 정치권, 글로벌 대기업, 시민사회가 원팀이 되어 협력할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정치권은 대기업의 역할을 보다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대기업도 해야 할 책무가 있다. 반기업 정서의 ‘역사적’ 유래를 성찰하고 계층사다리 복원과 사회통합을 위해 더욱 나서야 한다. 그 아픔과 미움을 보듬어야만 우리는 진실되게 단결할 수 있고, 현재의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