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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여자기사 최정의 외로운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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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최정

최정

여자기사 최정(사진) 9단의 한국랭킹은 17위. 그녀가 GS칼텍스배 프로기전 결승에 오르는 과정은 놀랍다. 강동윤 9단(랭킹 7위)에 이어 신민준 9단(랭킹4위)과 박진솔 9단(랭킹 21위)을 꺾었는데 강동윤과 신민준은 세계챔프들이다.

벅찬 남자 기사들과 맞서 싸우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최정의 모습은 눈 덮인 북극 탐험이나 히말라야 등반처럼 외로운 도전으로 다가온다. 최정은 여자로서는 다다르기 불가능한 곳을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 이길 수 없는 상대들을 이겨낸다. GS칼텍스배는 지난 27년간 남자만이 우승컵을 쥐었다. 여자가 결승에 오른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다.

여자기사는 랭킹 100위 안에 단 3명이 있다. 최정 외에 김은지(78위), 김채영(96위)이 있다. 남자와 여자를 비교하면 도무지 상대가 안 된다. 바둑은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여자가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지난 세월 이 질문을 수없이 던져봤지만 이제 나는 그 질문이 덧없다고 느낀다. 그보다는 “최정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나는 최정이 ‘남자 기전 우승’이라는 꿈을 이루기를 고대한다.

결승전의 상대는 변상일 9단이다.(변상일은 지금 중국에서 리쉬안하오 9단과 춘란배 세계대회 우승컵을 놓고 혈전 중이다.) 변상일(25)은 랭킹 3위, 최정(27)은 17위. 상대전적도 최정이 1승7패로 크게 밀린다. 힘든 상대다. 그러나 최정이 거둔 ‘1승’은 지난 번 삼성화재배 준결승에서 거둔 승리다. 최정은 당시 일본 1인자 이치리키 료, 중국 세계챔프 양딩신에 이어 변상일마저 꺾고 여자기사로는 사상 처음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다. 전인미답의 처녀지를 향한 기적 같은 여정이었다.(최정은 결승에서 신진서 9단에게 졌다.)

요즘 화제 속에 진행 중인 지지옥션배를 잠깐 언급해야겠다. 이 대회는 40세 이상의 남자기사와 여자기사가 대결한다. 처음엔 규정이 ‘남자 45세 이상’이었는데 남자가 자꾸 밀리다 보니 40세로 낮춰졌다. 올해는 시작부터 달랐다. 새로 편입된 40세 신참 이정우 9단이 6연승을 거두며 분위기를 확 달궈놓은 것이다. 승부 일선을 떠나 보급에 전념해온 이정우에게 여자 정예들이 힘을 못 쓴 것이다. 남녀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실례다.

최정과 비교되는 유일한 여자기사가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이다. 그는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1년, 이창호 9단과 조훈현 9단을 연파하고 국수전에서 우승했다. 여자가 남자 기전에서 우승한 첫 사례로 바둑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루이는 천안문 사태 이후 장주주 9단과 함께 중국을 떠나 일본·미국으로 유랑했다. 시합은 한판도 두지 못하다가 1992년 제2회 응씨배에 초청받았다. 감격한 루이와 장주주는 대국에 나서기 전 도쿄에서 문자 그대로 냉수 한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 분위기는 비장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응씨배 출정식에 가까웠다. 루이는 응씨배에서 당당 4강까지 올라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4강에서 일본의 오타케 9단에게 졌고 우승컵은 서봉수 9단에게 돌아갔다.

얼마 전 같은데 이제 그때의 인물들은 모두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루이는 올해 60세.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고 그 힘으로 지금도 중국 갑조 리그에서 씩씩하게 활약 중이다.

최정 9단은 2013년부터 10년간 한국 여자랭킹 1위다. 여자기사 최초로 세계대회 준우승을 거뒀다. 현재 26회 타이틀을 획득해(이 중 8개는 국제대회) 루이나이웨이의 31회에 근접했다. 2014년 여자기사 최초로 연간상금 1억원을 돌파했고 이후 24억(연평균 2억5000만원)을 벌었다.

최정의 바둑인생은 최다·최초·최고의 수식어로 점철되어있다. 그가 우승컵을 높이 들어 올려 다시 한번 바둑사를 장식할 수 있을까. 변상일과의 GS칼텍스배 결승전은 5번기, 23일 시작된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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