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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장섭의 이코노믹스

삼성, 신기술 앞서도 ‘양산’ 경쟁 뒤지면 TSMC 못 잡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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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삼성과 TSMC 경쟁, 어떻게 될까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은 처음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 참여를 검토했지만, 삼성전자가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포기하고 파운드리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파운드리에 본격 투자하던 2000년대 초반에 TSMC는 부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삼성보다 한참 뒤진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TSMC는 이제 삼성을 제치고 매출이나 시가총액에서 최강자 자리에 올라섰다. 거꾸로 삼성이 후발주자로 ‘TSMC 따라잡기’ 게임을 벌인다. 하지만 최근 삼성과 TSMC 간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다. 삼성과 TSMC의 경쟁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고객사와 경쟁, 삼성 아킬레스건
주문생산 유연 대처 능력 떨어져
메모리서 축적한 제조능력 강점

양산경쟁 밀린 도시바 반면교사
파운드리 ‘확실한 2위’ 확보하고
다변화 바탕 ‘종합 1위’ 추구해야

종합제조사(IDM)·팹리스·파운드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월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월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경쟁의 향배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먼저 1990년대부터 진행된 반도체산업의 구조 변화를 이해해야 한다. 원래 반도체 회사들은 모두 설계와 제조(fabrication)를 함께 하는 종합제조사(IDM)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설계만 하고, 제조는 외주하는 팹리스(fabless)들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외주에 기존 IDM의 여유설비를 활용했지만, 곧 외주만 전문으로 받는 파운드리(foundry)가 등장했다. 대만의 UMC가 선도했고 TSMC가 따라붙었다.

팹리스들은 설비투자 부담에서 벗어나면서 설계 혁신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에 따라 파운드리 시장도 빠르게 팽창했다. 2000년에 ‘팹리스-파운드리 연합’(FF)의 매출은 99억 달러로 세계시장의 9%에 불과했다. 그러나 FF는 2021년 1777억 달러의 매출로 시장의 34.8%를 장악했다. IDM의 비중은 65.2%로 줄었다(그래프 참조). 삼성의 아성인 메모리에서는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반주문반도체(ASICs)는 완전히 FF의 영역이 됐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도 거의 FF가 만든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도 FF가 약진한다. 만년 2위였던 AMD가 팹리스로 전환했고 작년에 인텔을 앞질렀다.

FF의 성장세를 보고 IDM인 삼성이 2005년 파운드리에 뛰어들었다. 인텔은 2019년에나 진입했다. 이에 따라 IDM과 팹리스, 파운드리 간에 복잡한 경쟁·협력 관계가 작동한다. 퀄컴이나 엔비디아 등  팹리스와 TSMC·UMC 등 순수 파운드리 간에는 협력 관계만 존재한다. 그러나 삼성과 인텔 같은 IDM은 자신의 설계를 적용한 제품에서 팹리스와 경쟁한다. 한편 IDM의 파운드리 사업부는 팹리스와 협력한다. 다른 파운드리들과는 경쟁한다(그림 참조).

TSMC “고객과 경쟁 않는다” 내세워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TSMC는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내세운다. 반면 삼성에는 고객과의 경쟁 관계가 아킬레스건이다. 삼성 파운드리는 초기에 애플에 시스템반도체를 공급하면서 많이 컸다. 그러나 애플이 휴대폰 사업 경쟁자인 삼성을 견제하며 TSMC로 주문을 옮겨 타격을 입었다. 삼성은 이후 파운드리 사업부를 독립시켜 고객의 설계가 삼성의 IDM부서로 넘어갈 가능성을 차단했다. 하지만 팹리스 입장에서는 삼성이 아무리 ‘방화벽’을 단단히 쳤다고 얘기하고 기술유출방지 계약서를 썼어도 삼성을 100% 신뢰하기 어렵다.

삼성의 또 다른 단점은 범용제품인 메모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주문생산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TSMC는 “400명의 파트너와 춤춘다”고 말한다. 반면 삼성은 많은 파트너에 맞춰 춤추는 방법을 배워가며 추격한다. 지적재산권(IP) 등 파운드리 생태계 확보도 TSMC에 뒤진다.

그러나 삼성은 IDM으로서 장점을 갖고 있다. 가장 큰 것이 메모리에서 축적한 제조 능력이다. 메모리는 가장 대량생산되는 제품이기 때문에 제조기술을 선도한다. 많은 사람이 메모리는 10나노에서 경쟁하고 파운드리는 3나노에서 경쟁하는 사실만 놓고, 파운드리가 제조역량을 선도하는 듯이 착각한다. 그러나 제조 역량에는 회로선폭 뿐만 아니라 트랜지스터 구조, 설비 활용 등 다양한 기술이 포함된다.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는 1985년 일본에 밀려 D램 사업을 접을 때 마지막까지 주저했다. 메모리가 제조기술을 선도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 삼성이 2014년 14나노 경쟁에서 TSMC를 앞지르고 빠르게 파운드리 세계 2위로 올라선 데는 이 제조역량이 큰 몫을 했다.

삼성의 설계 능력도 TSMC가 갖지 못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리한 뒤 거의 활용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전장이나 이미지센서 등 IDM 부문이 약진하면서 파운드리 사업부에 제조를 맡긴다. 내부 수요라는 장점이 남아 있다. 금융 능력도 장점이다. TSMC는 오직 자신에게만 의존해야 한다. 반면 삼성 파운드리는 메모리나 가전 등 다른 부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계열사 자금도 동원할 수 있다. 올 초 메모리가 부진하자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빌려 투자를 이어간 것이 대표적 사례다.

투자 실기 부른 경영 공백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삼성은 2위까지 빠르게 치고 올라왔지만 최근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2018년에는 시장점유율이 TSMC 42.7%, 삼성 16.0%였는데, 2022년엔 53.5% 대 15.6%로 격차가 벌어졌다. 표면적 이유는 극자외선(EUV) 장비 전환이 늦어진 데 있다. 14나노 경쟁에서 삼성에 따라잡혔던 TSMC는 EUV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그 결과 7나노, 5나노, 4나노 경쟁에서 앞질러 갔다. ‘투자의 삼성’이 EUV 투자에 늦은 데는 추격에 어느 정도 성공한 뒤 느슨해진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최순실 사태’에 휘말려 이재용 회장의 행보가 제약당하고, 미래전략실이 해체되면서 경영 공백이 생겼던 데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삼성의 공격적 투자는 그룹 회장과 미래전략실, 계열사의 ‘3박자’가 맞으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3박자 중 2박자가 공백이니,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혼자 과감히 나가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이 당시 삼성은 ‘안전 경영’ 모드로 들어갔다. 추격에 고삐를 당겨야 하는 파운드리 사업부조차 매출 확대보다 이익 우선으로 경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만약 이때 EUV 투자를 TSMC와 비슷하게 했다면 삼성의 점유율이 25%를 넘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삼성, ‘램프업’ 경쟁에서 앞서야

삼성은 지금 한발 늦었지만, 전열을 재정비하고 TSMC 캐치업(catch-up) 전쟁에 임하고 있다. 삼성의 신무기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이다. TSMC는 핀펫(FinFET) 기술로 미세공정에서 앞서 나갔다. 삼성도 처음에는 핀펫을 쫓아가다 3나노에서 GAA를 적용하며 건너뛰기를 시도하고 있다. GAA는 핀펫보다 전류 흐름을 세밀하게 통제해서 반도체의 안정성도 높이고 크기도 줄이는 장점이 있다. 대신 새로운 기술이라 어려운 과제들을 더 많이 극복해야 한다. 삼성은 3나노에서 축적한 GAA역량을 활용해서 2나노와 1.4나노에서 뒤집기를 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의 전략 성공에 중요한 것이 생산량을 확대하며 공정개선, 수율 상승 등을 통해 단가를 낮추는 ‘램프업(ramp-up)’ 능력이다. 삼성은 메모리에서 누구보다 강력한 램프업 능력을 구축하며 세계 1위를 지켰다. 1990년대 낸드(NAND) 경쟁에서 도시바는 시제품을 항상 먼저 내놓았다. 하지만 삼성은 램프업 능력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상용제품을 먼저 내놓았다. 당시 일본 언론은 “삼성전자는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손을 뒤늦게 낸다(그래서 이긴다)”고 평했다. 삼성이 GAA 도입에 앞서나갔어도 2나노부터 한 박자 늦게 뛰어드는 TSMC에 램프업에서 따라잡히면 도시바와 같은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싱가포르 국립대의 전문가는 “삼성전자 직원들은 6시면 퇴근하니까 5시쯤 개선할 문제를 발견했을 때 다음 날로 미루지만, TSMC 직원들은 야근하더라도 그날 해결한다”고 말한다. 이런 조그만 일들이 축적되면 램프업 속도에 큰 차이가 난다. 삼성은 문제 해결 플로우(flow)가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내부시스템을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경직적 주 52시간 근무가 질곡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정치가 한국 기업의 뒷다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IDM으로서 삼성은 파운드리에서 1등 하겠다고 무리할 필요는 없다. 시장점유율을 25~30% 정도까지 늘려 확실한 2위를 굳히면 된다. 파운드리 시장이 빠르게 확장하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하더라도 굉장히 좋은 사업이다.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TSMC에 고객 관계에서는 밀리더라도 신기술과 램프업에서 조금이라도 앞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와 함께 ‘종합 1위’ 목표에 더 진력해야 한다. 메모리에서 1등 자리를 잘 지키고 다른 시스템반도체에서 확장하면서 가장 다변화된 반도체회사라는 장점을 잘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