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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 젊은 미녀 아닌 힘센 할머니... 한국 태고 신화에 빠진 캐나다 교포 미술가 제이디 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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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19면

한국 여신에 빠진 교포작가 제이디 차

한국 설화에서 영감을 받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40)의 그림들. ‘깊은 꿈에 빠지다’(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한국 설화에서 영감을 받는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40)의 그림들. ‘깊은 꿈에 빠지다’(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한국 드라마 ‘전설의 고향’과 서구의 신화 판타지 영화가 결합된다면 이런 분위기일까. 마곡에 있는 스페이스K 서울에서 13일에 시작한 한국계 캐나다 작가 제이디 차(40)의 개인전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 전시장 이야기다.

전시장 입구에는 한국 전통 조각보 형태로 일몰과 월출을 표현한 작품이 걸려 있다. 그 사이에는 북청사자처럼 생긴 해태를 탄 색동옷 할머니의 조각이 있다.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인형 꼭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데, 대개 해태를 탄 우두머리 꼭두는 남성 장군인 것에 반해 작가는 이를 한국의 태고신 마고할미로 만들었다.

한국 신화에 페미니즘적 요소 많아

‘미래의 우리들’(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미래의 우리들’(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다음 공간으로 들어가면 신비로운 혼종성(混種性)의 극치를 만나게 된다. 색색의 미로 같은 공간에 유화들이 걸려 있는데, 주로 요괴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한 반인반수(半人半獸)와 하이브리드 동물의 초상화들이다. 세계 각국의 신화·전설을 연상시키면서도 특정한 옛 그림이나 현대 대중매체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아니라서 신선하다.

예컨대 여우의 귀를 달고 백발을 휘날리는 주름진 얼굴의 여성은 불길한 마녀도 인자한 할머니도 아닌, 신비롭고 위엄에 찬 모습이다. 강력한 동아시아 태고신이나 지혜로운 북아메리카 원주민 샤먼을 연상시킨다. 또한 동그란 검은 얼굴에 산신령 백발 같은 긴 털을 휘날리는 짐승의 그림들은 사실 작가의 반려견 페키니즈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마치 옛 중국의 지리서 『산해경』에 등장하는 괴수 같기도 한, 귀여우면서도 기괴한 모습이다.

미로를 나오면 마치 무대나 제단 같은것이 설치된 커다란 공간을 만나게 된다. 무대·제단 위에는 유럽 성당의 제단화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세 폭 그림이 펼쳐지는데 온갖 하이브리드 동물들이 달밤의 회합을 가지는 모습이다. 그림 제목은 ‘트릭스터, 잡종, 짐승’이다. 트릭스터는 선악을 종잡을 수 없고 규범을 초월하는 장난을 쳐서 세상을 혼란하게 하는 신화 속의 존재를 아우르는 말. 그러니 차 작가의 작품 속 존재들은 외적 형태뿐만 아니라 그 내면적 본질에서도 혼종성이 특징인 것이다. 이것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외국으로 흩어진 한국인)’이며 여성인 작가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구름 수호자’(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구름 수호자’(2023). [사진 스페이스K 서울]

그러한 혼종성이 작품 스타일에도 반영되어 “작가의 작품을 보면 서구인들은 무척 동아시아적이며 이국적이라고 느끼고, 반대로 한국인들은 서구적이며 이국적이라고 느낀다”라고 이장욱 스페이스K 서울 수석 큐레이터는 설명했다. “이러한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은 한국 문화의 지평을 넓히고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마지막 공간에 걸린 커다란 회화들 중에는 산신의 그림도 있다. 산신이 운무에 둘러싸여 호랑이를 품고 있는 형상이 전통 사찰의 산신각 탱화와 닮았다. 특이한 점은 산신이 할아버지가 아닌 할머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많은 산신들이 여성이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서 김유신을 도와주는 신라의 세 호국신과 어진 비구니를 도와주는 경주 선도산 성모(聖母)는 모두 여성 산신이다.

밴쿠버에서 나고 자라서 한국어를 많이 알지 못하는 제이디 차 작가는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함에 중앙SUNDAY는 스페이스K 서울에서 작가를 만났다. 작가는 에밀리 카 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런던 왕립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런던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런던의 주요 미술공간인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같은 해 제주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다. 세계 주요 갤러리 중 하나인 타데우스 로팍의 서울지점은 올해 초 젊은 한국계 작가 3인을 발굴한 전시에 차 작가를 포함시켰다. 다음은 작가와의 일문일답.

작가 모습. [사진 스페이스K 서울]

작가 모습. [사진 스페이스K 서울]

한국 신화를 어떻게 접했는지 궁금하다. 영어로 된 책을 통해서였는가, 아니면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서였는가?
“처음에는 어렸을 때 엄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그러다가 지난 7년여 간 점차 학문적인 관점에서 민속과 신화를 바라보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주로 책과 인터넷 자료를 가지고 독학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민속과 민담이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사용되는 방식에 서로 유사점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찾는 데에 흥미가 많다.”

구미호·여우, 권력 구조에 반하는 존재

당신의 작품, 특히 그 속에 있는 한국 신화 모티프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일단 한국 민화에 나오는 동물들을 알릴 수 있어 기쁘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화가들이 옛 거장들을 참조하는데, 나는 의식적으로 서양미술사를 참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보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 민화에 친숙했기 때문에 그 도상을 삽입하는 게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내 작품에는 역사를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하고 미래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구상하고자 하는 매우 강한 함의가 있다. 한국의 신화 중에는 페미니즘적인 요소와 페미니스트적 관점으로 재해석할 여지가 상당히 많은 신화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마고 할미는 정말 흥미롭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한마디로 ‘와우’라고 생각했다. 아주 힘세고 거대한 아시아 할머니가 손으로 산을 만드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대변과 소변도 (산과 강을 만드는 데) 이용한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들은 주인공이 여성이면 젊고 매력적인 경우가 대부분 아닌가. 그런데 이 태고의 신화에서는 늙은 여성을 높고 강력한 존재로 보고 있었다.”
작품에서 구미호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구미호는 요염한 여자로 변신해 사람을 홀리는 사악한 괴물로 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더 오랜 신화·전설에서는 구미호가 때때로 신성한 영물로 여겨지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설화를 보면 구미호는 흥미로운 특성이 많다. 유럽문화에서도 여우는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고 규범을 초월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구미호나 여우는 규범과 통제가 강한 사회에서는 악마나 괴물로 격하되는 것이다. 과거 역사에서, 통제할 수 없는 여성은 사악하다고 여겨져서 악마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구미호나 여우는) 다루기 힘든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 현상 유지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방식을 지시하는 정치적 권력 구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중문화에서는 여우 요괴가 그저 가볍게 다뤄진다. 심지어 마고할미도 그렇다. 내가 찾은 한국의 문헌에서 마고할미는 뭔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다가 미국 거주 한국 학자인 헬렌 혜숙 황의 책 『마고의 길: 동아시아의 대(大)여신 마고의 재발견(영문 제목 번역)』(2015)을 읽게 되었는데, 그녀의 연구는 다층적이고 흥미로웠다. 황 박사에 따르면 마고할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하고 종교적인 측면이 제거되었고 그저 유머러스한 민담의 주인공으로 남게 되었지만, 본래는 상당히 깊은 층위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당신 그림에는 늙은 여성들이 신비롭고 위엄 있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러한 태고신의 부활인가?
“아시아에는 노인 공경 문화가 있는 반면에, 서양 문화에는 그런 게 없어서 노인에 대해, 특히 여성 노인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서서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여성은 성적 매력을 지니는 시기가 지나면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이야기의 주인공이 결코 나이 든 여성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신화의 ‘할미’ 신들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서양 민속학에서도 노파를 부정적으로 보지만 초자연적인 힘과 비밀스러운 지식을 지니는 두려운 존재로 보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면서 이런 문제를 더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노인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도 언제나 다정하고 온화하게 그리는 것도 아닌, 그들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성격, 그리고 강력한 면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의 노인 그림들은 미래의 나의 자화상이나 내가 되고 싶은 자화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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