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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현호의 법과 삶

약자 학대 방조하는 허술한 법체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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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

법은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법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를 벗어나 사회적 약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으며 살게 됐다. 법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한 손에 법전을, 다른 한 손에 칼을 높이 들고 있는 이유는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칼로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윤리는 위반해도 사회적 비난에 그치지만, 법은 위반하면 처벌받는다. 교도소에 갈 수 있다는 공포심이 있어야 법이 실현된다. 위반해도 처벌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면 “법을 안 지켜도 아무 일 없다”며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처벌조항이 없는 법이 꽤 있다. 아동학대처벌법, 장애인복지법, 노인복지법들이 그렇다.

학대 피해 느는데 신고는 줄어
신고의무 안 지켜도 처벌 없어
미신고 그림자 아기 없애려면
자동출생등록제 등 도입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법에는 학대받는 아동, 장애인, 노인에 대한 신고의무를 두고 있으나, 신고하지 않아도 처벌할 수 없다. 2020년 장애인 학대 신고는 4208건, 노인학대 신고는 1만6973건, 아동학대 신고는 4만2251건에 이르는 등 매년 증가하고 있으나, 신고 의무자에 의한 신고 건수는 오히려 줄기도 한다. 우리나라 아동학대 발견율은 3.81%로, 미국 9.2%, 호주 10.1% 등 아동인권 선진국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수사기관 신고 건수는 아동학대 발견율보다 낮은 1∼2%로 추정된다. 신고되지 않은 학대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이야기다.

얼마 전 장애인이 배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자 요양보호사가 항문에 패드를 넣는 학대행위를 했다. 삐져나온 패드를 간호조무사가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렸으나 누구도 신고하지 않았다. 작년에는 김천의 한 노인보호센터에서 80·90대 치매 노인들을 장기간 상습적으로 묶고, 비닐테이프로 입을 막는 등 학대했다. 울산의 한 노인요양원에서는 치매 여성환자가 상습 성추행당했으나 시설 종사자들은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 올 초 12세의 아동이 계모의 폭행으로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아동은 또래보다 매우 왜소하여 학대 의심이 있고, 두 달 이상 장기 결석했음에도 교사는 신고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아동 학대 경우는 투명인간으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영아들이다. 쓰레기통이나 냉장고에서 발견돼서야 태어났다는 것이 알려진다. 땅에 묻히거나 바다에 버려져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영원히 알지 못한다.

장애인, 노인, 아동, 영아는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가장 취약한 사회적 약자다. 학대가 의심되면 빨리 보호기관이나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가해자로부터 분리되고 추가 학대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이들을 직접 마주치는 유아원장, 교사, 의료인, 요양시설 종사자, 119 구급대원 등은 학대 사실을 알게 된 경우나 의심스러울 경우에는 즉시 지방자치단체, 보호전문기관, 수사기관에 신고하도록 의무화돼있다.

그러나 신고하면 참고인 조사, 증인 신문 등으로 불려 다녀 귀찮고, 자주 봐 왔던 가해자와의 관계가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신고를 꺼린다. 더 큰 이유는 신고하지 않아도 처벌 할 수 있는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신고 의무자가 신고하지 않을 경우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이 가능하나, 실제 처분을 받은 경우는 찾기 힘들다. 신고 의무가 윤리적 의무로 전락하여 실효성을 상실했다.

미국의 뉴욕주·일리노이주·캘리포니아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주, 대만 등에서는 신고 의무자가 신고하지 않거나 거짓 신고를 하면 처벌과 함께 자격정지 취소처분을 받는다. 물론 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신고 의무자의 신고 불이행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학대 방치로 학대 횟수와 강도가 더 늘어난다. 결국 학대는 사망한 후에야 멈춘다는 것이 경험칙이다.

우리는 유아기를 거쳐 노인이 되고, 그 사이 한두개씩의 장애를 앓는 장애인으로 지낸다. 학대는 노출되지 않으면 막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신고 의무자조차 신고를 꺼리고, 어렵게 신고해도 관련 기관은 가족 간 문제라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바람에 아동, 장애인, 노인 학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최근 국회는 의료기관이 지자체에 출생 사실을 통보하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의료기관이 지연하거나 누락하면 사각지대가 생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이 분만비 심사 시 의무적으로 대법원장에게 통지하여 출생 등록하게 하는 자동출생등록제로 바꾸어야 한다.

아동학대처벌법, 장애인복지법, 노인복지법에 신고 의무자의 범위를 더 넓히고, 신고의무 불이행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한 처벌과 함께 자격정지·취소규정을 신설해야 한다. 학대 범죄를 예방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실질적 도움이 되는 사회보장이다. 연간 5000명가량으로 추정되는 의료기관 외 출생 신생아에게 충분한 양육비를 지원하고, 산모에게 비밀보장, 취업 알선, 입양 주선 등으로 ‘버리는 것보다 키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신현호 변호사·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