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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호주-인구의 인도와 손잡고 G10 가입 추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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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냉전 시대 한국의 국가전략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사무총장·이화여대 교수

신냉전 초입, 미국과 중국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양국 관계를 더는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패권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 모두 예기치 못한 우발적 충돌이 더 큰 충돌로 번지는 사태를 방지하는 ‘갈등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20세기 세계전쟁 비극의 교훈이다. 어렵게 성사된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의 6월 18~19일 중국 방문은 그런 의지의 표현이다. 블링컨은 중국 외교 최고위 당국자들을 만났고 시진핑 주석과도 대면했다. 미·중 갈등관리에 대한 양국 리더들의 의지가 확인된 지라, 9월 인도 뉴델리 G20 정상회의,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APEC 정상회의에서 바이든-시진핑 정상회담 추진으로 연결될 전망이다.

신냉전 격랑 관리 G7은 역부족
WTO는 식물화, G20 한계상황
글로벌 경제운영 새 지휘부 필요

G7 확대 개편에 한국 참여 당연
호주·인도와 전략공간 넓혀야

미·중 갈등 관리 국면 전개

지난달 20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및 참관국 정상들의 기념 촬영 모습. [뉴스1]

지난달 20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및 참관국 정상들의 기념 촬영 모습. [뉴스1]

갈등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심각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트럼프 때부터 본격화한 미·중 격돌은 바이든 취임 이후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이든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시작한 대중 견제책은 중국 의존적 공급망 개편. 그 핵심은 반도체 분야의 중국 굴기 견제다. 디자인, 소재, 부품, 장비, 조립과정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생태계를 만들려는 미국의 전략적 시도는 디커플링(decoupling)으로 불려 왔다. 반도체 디커플링을 위해 미국은 보조금으로 동맹국의 투자유치,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에 대한 핵심 장비와 부품 공급 제한 등을 집요하게 추진해왔다.

단기적 효율성을 버리고 전략적 안정성의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한 미국의 반도체 디커플링 추진은 중국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 반도체 공장을 돌리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중국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는 기업가 불만과 분석가 주장이 거세질수록, 미국 전략가들은 반도체 디커플링의 결기를 다지고 있다. 중국의 비용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을 찾아내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치명적 위험성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산업의 핵심소재인 동시에 군사, 안보의 핵심소재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는 미룰 수 없는 ‘적기’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연합한 전체주의와의 체제 대결을 벌이는 선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지휘부인 주요 7개국(G7) 내부에는 미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작년 11월 올라프 숄츠 신임 독일 총리는 폭스바겐, 바스프, 아디다스의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인들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올해 4월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중국으로 날아가 시 주석을 만났다. 그들은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지만, 미·중 신냉전의 격화 속에 ‘가치공유 동맹’의 영역에만 갇혀 있기엔 답답해한다. 당장의 경제적 실리를 따져야 차기 선거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국가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숄츠는 “중국과의 분리를 원하지는 않지만, 지나친 의존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크롱은 “유럽과 무관한 위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애플과 테슬라의 중국 투자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면서 동맹국의 중국 투자는 견제하는 미국의 내로남불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탈중국’에서 ‘리스크 배제’로

G7

G7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 탈(脫)중국으로 해석되던 ‘디커플링’은 뒤로 숨고, 리스크 배제를 의미하는 ‘디리스킹(derisking)’이 슬그머니 등장했다.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처음 ‘디리스킹’을 공식화한 후, 독일과 프랑스가 발 빠르게 가세했다. “중국과 디커플링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유럽의 이익에도 맞지 않는다”는 이유와 함께. 얼마 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도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5월 일본 히로시마 G7정상회의는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을 공동성명에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디리스킹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는 격언처럼 자산관리의 기본에 속한다. 중국과 분리할 건 분리하고 협력할 건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반도체에서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디리스킹의 일부이고, 경제안보 함의가 미미한 소비재 분야에서의 중국투자 확대도 디리스킹에 속한다. 본질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할 분야를 설정하고 나머지 분야는 기존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이른바 ‘좁은 운동장, 높은 장벽(small yard, high fence)’ 전략은 바이든 정부의 중국 견제전략의 핵심이다.

경제와 안보 분리되지 않는 신냉전

신냉전의 본질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전체주의 체제의 격돌이다. 20세기 냉전에서는 다른 체제 간의 경제적 교류가 없었지만, 21세기 신냉전이 시작되는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진영 기업들이 전체주의 국가들과 무역·투자로 이미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냉전 종식 후 세계를 휩쓸었던 세계화 30년 동안에 걸쳐 구축되고 진화한 얽히고설킨 경제교류 네트위크를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잘라 낼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기존 네트워크를 지속한다는 것은 이미 ‘경제의  무기화’ 전략을 구사하는 전체주의 국가에 칼자루를 쥐여 주는 격이다. 경제와 안보가 따로 놀 수 없는 신냉전 시대 국가경영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기 냉전에서 미국 주도 자유 진영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재건을 위한 대규모 원조와 동맹국에 대한 세계 최대 시장 미국의 개방 덕분이다. 동맹국의 경제성장과 번영이 이어졌고, 상대진영 국가에겐 좌절·질투·이탈을 초래했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외치는 것만으로 냉전의 승패가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21세기 신냉전 초입에 미국은 다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인권의 가치를 내걸었다. 하지만 전체주의 시장의 마법에 걸린 다른 동맹국의 마음을 다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전통적 동맹인 선진 자유민주주의국 연합체인 G7만으론 신냉전의 격랑을 헤쳐가기에 역부족이다. 미국과 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글로벌 사우스’의 힘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미국 주도 글로벌 기구, 문제 노출

미국이 주도했던 글로벌 경제 규칙 운영의 장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는 식물화됐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미국이 주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출발점이지만 미국은 TPP 체결 후 스스로 탈퇴했고, 분열된 미국정치 때문에 돌아갈 길이 차단된 상태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면서 글로벌 경제 운영 지휘부로 부상했던 G20은 이제 문제 해결 주체가 아닌 대립과 반목의 장으로 전락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혼돈의 시대, 명료한 비전과 일관된 행동지침을 내릴 수 있는 글로벌 경제 운영의 지휘부는 어디일까. 자명한 결론은 G7의 확대 개편이다. 바로 여기에 신냉전 시대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한국의 전략적 공간이 있다.

외교 공간을 한반도와 그 주변을 뛰어넘어 전 세계로 확장하고, 개도국 발전 원조, 기후변화, 지속가능한 에너지 생태계, 글로벌 디지털 규범, 우주개발 등 글로벌 이슈에서 글로벌 플레이어로 등장한 대한민국. 반도체, 배터리, 방위산업에서 한국을 빼고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거기에 걸맞은 역할이 부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G7 확대개편 참여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한국만 추가된 G8은 일본이 견제

한국 외교 당국자들은 G8 논의로 군불을 지피고 있지만, G8을 원한다면 다른 전략적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한국만 추가된 G8은 한국의 국가적 위상을 뽐내게 할 것이지만, 기존의 G7 국가들이 원할지는 미지수다. 특히 유일한 비서방 국가인 일본의 견제와 반대를 넘어야 한다. 미래지향 한일외교의 시동과 한미일 공조체제 강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G7 국가이고 싶어 한다. G7 회의 때 초청국으로 참여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일본 정치권의 반응이다. 옵서버와 회원국의 차이는 극명하다.

한국은 G7 확대 참여에 적합한 다른 국가들을 찾아서 연합해야 한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충족하는 국가는 어디일까. 효과적인 디리스킹 전략을 위해서는 선진 민주주의국가면서 다양한 광물자원 보유국인 호주를 빼고서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서구진영만의 리그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글로벌 사우스의 대표주자를 영입해야 한다. 또한 인구·시장에서 중국의 유일한 대체 가능국으로 인식되는 민주주의 체제의 인도가 답이다. 마침 모디 인도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여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한국, 호주, 인도가 추가된 G10을 추진해야 한국의 G8 참여가 가능하다. 냉전 종식 직후 북방외교로 한국의 전략적 공간을 확장했던 기억이 이젠 아득하다. 21세기 향방을 좌우할 변곡점에서 한국외교의 상상력과 실행력에 베팅해도 좋을까.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