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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뼈아픈 상처 경험해야 꽃은 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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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신진서(오른쪽) 9단이 지난 14일 제1회 난가배세계오픈 결승에서 구쯔하오(25) 9단에게 164수 만에 백 불계승했다. [사진 한국기원]

신진서(오른쪽) 9단이 지난 14일 제1회 난가배세계오픈 결승에서 구쯔하오(25) 9단에게 164수 만에 백 불계승했다. [사진 한국기원]

세계 최강자 신진서 9단이 제1회 난가배 세계오픈 결승에서 중국 3위 구쯔하오 9단에게 패배했다. 신진서는 도저히 질 수 없는 기사였다. 모든 기록에서 그는 무적이었다. TV 중계를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탄식했다. 한편 그렇게 탄식하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도산검림의 승부세계에서 신진서는 어째서 매번 이겨야 하는가.

2년 전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 상대는 박정환 9단. 신진서는 세계대회서 17연승 중이었고 더구나 박정환에겐 12전 12승을 거두고 있었다. 박정환은 더 이상 신진서의 적수가 아니었다. 더구나 첫판은 신진서의 승리. (부끄럽지만 나도 신진서의 승리 스토리를 미리 써놓았던 기억이 있다)

결과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2국과 3국에서 박정환이 잇달아 승리하며 우승컵을 가져간 것이다. 구경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본인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아무도 그에게 패인을 묻지 않았다.

이번 난가배는 그때의 데자뷔였다. 결승전 시작 직전 신진서는 국내대회 13연승, 세계대회 7연승을 기록 중이었다. 특히 놀라운 것은 92.2%(59승 5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이었다.

지금까지의 최고 승률은 신진서 자신이 세운 88.37%. 그는 이창호 9단이 갖고 있던 최고승률(88.24%)을 32년 만에 경신한 데 이어 올해는 바둑 사상 전례가 없는 90%대 승률에 도전하고 있었다.

난가배 결승 첫판은 신진서의 완승. 흠잡을 데 없는 바둑 내용에 중국 측은 아마도 절망했을 것이다. 대국이 열린 저장성 취저우시까지 미위팅·셰커 등 많은 기사가 몰려와 함께 연구하는 등 신진서 타도에 몰두하는 분위기였지만 신진서는 이미 천상에서 노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며 모든 게 변했다. 2국은 구쯔하오의 완승이고 신진서의 완패였다. 그리고 3국은 처음엔 앞서갔으나 어느 틈에 바둑이 엷어졌고 고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구쯔하오는 승리 후 감동적인 어조로 “나는 돌파했다. 그러나 신진서는 여전히 강한 선수다”고 말했다. 신진서에게 당장 전화해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신진서는 인터뷰를 거절하는 법이 없고 그게 일인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참았다. 스승도 없이 혼자 커온 신진서는 이제 23세다. 젊고 격정적인 그의 마음은 지금 어디론가 한없이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에게 어떤 위로나 충고도 하고 싶지 않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느니 승부는 어차피 자신과의 싸움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다 부질없다. 이럴 때면 나는 그가 처음 프로가 되었을 때(13세 때)의 발언을 떠올린다.

“저는 바둑을 미칠 듯이 좋아한 적도 없지만 굉장히 싫어한 적도 없습니다. 바둑은 저에게 평범히 생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진서에게 바둑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활 그 자체였다. 밥숟가락처럼 더불어 사는 존재였다. 3년 전 커제 9단과의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마우스 오작동으로 바둑 수가 1선에 찍혔다. 그때 신진서는 처음 분노와 격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는 “이제부터 세계대회서 한판도 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게 세계대회 17연승까지 이어졌다.

신진서도 뼈아픈 패배에는 상처를 입는다. 그 터널을 지나 꽃이 만개한 듯싶을 때 아픈 패배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신진서는 다시금 어두운 터널을 걷게 된다. 그게 천재기사 신진서의 삶이다. 그러므로 신진서라는 꽃이 다시 만개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9월엔 바둑 종목에 3개의 메달이 걸린 상하이 아시안게임이 있다. 남자 개인전, 남녀 단체전이 열리는데 한·중의 불타는 시선이 오래전부터 여기를 향하고 있다. 그 앞 8월에는 응씨배 결승전이 역시 적지 상하이에서 열린다. 결승의 주인공은 신진서와 중국의 신예 셰커.

이 두 번의 빅매치에서 신진서가 모두 우승한다면 이번 난가배 패배는 오히려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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