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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수익 사업 일절 않고, 임원들 무보수로 근무 결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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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호 16면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이 광복회관에서 진행된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신뢰받는 광복회로 거듭나겠다”며 각오를 밝히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이 광복회관에서 진행된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신뢰받는 광복회로 거듭나겠다”며 각오를 밝히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저희 지도부는 어떠한 수익 사업도 하지 말자고 결의했습니다.”

이종찬(87) 신임 광복회장의 첫 일성은 ‘국민의 신뢰 회복’이었다. 광복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면서다. 이 회장은 특히 김원웅 전 광복회장 때부터 이어진 무리한 수익 사업으로 광복회 부채가 급증하고 회원들 사이의 반목이 커진 상황에서 이를 바로잡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일체의 수익 사업도 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이런 고민 끝에 나왔다. 실제로 광복회는 현재 누적 부채만 20억여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중앙SUNDAY·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뼈를 깎는 노력과 희생을 통해 광복회를 정상화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이란 광복회 본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제23대 광복회장에 당선돼 지난 1일 임기를 시작한 이 회장은 “와서 보니 이대로 가다가는 곧 파산할 지경”이라며 “옛말에 ‘남산골 샌님이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말이 있듯이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부채 청산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저를 포함해 임원들 모두 솔선수범해 무보수 명예직으로 근무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나이 부담되나 회원들 목소리 외면 못해

2019년 광복회장 선거에서 낙선했는데 이번에 다시 출마할 결심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으셨을 듯합니다.
“제 나이를 생각하면 광복회장 자리를 맡는 게 사실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개혁을 원하는 회원들 목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월엔 광복회 미래를 걱정하는 광복회원 일동 명의로 저의 출마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써서 제게 전달하기도 했고요. 결국 광복회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게 제 임무라는 생각이 들어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회원들로부터 개혁 의지를 수임받아 일하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광복회가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심경이 복잡하셨을 것 같습니다.
“지난 1년간 광복회장이 직무대행까지 포함해 네 번(김원웅→허현→장호권→김진→최광휴) 바뀌었습니다. 그중 두 명은 수사를 받았고요. 회원들도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고소·고발을 남발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광복회는 침몰하겠다 싶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새 지도부 모두 광복회 개혁과 정상화를 위한 특단의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정상화를 위한 선결 과제는 무엇입니까.
“현재 광복회 재정 상태를 보니 긴축하지 않으면 파산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부채를 청산할 때까지만이라도 회장인 저를 포함해 부회장·사무총장과 실·국장 등이 뜻을 모아 무보수 명예직으로 근무하자고 결의했습니다.”
기존의 수익 사업들을 활성화하는 것도 부채 청산의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 지도부는 어떠한 수익 사업도 하지 말자고 결의했습니다. 광복회가 이 지경에 이른 건 전임 회장과 지도부가 돈에 현혹돼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긴축하고, 그런데도 빚을 갚기 힘들면 사회 각계로부터 후원을 받아 문제를 극복해 나갈 생각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정도를 걷겠다는 각오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습니다.”
광복회가 극심한 내홍을 겪자 일각에선 광복회 해체론까지 제기됐습니다.
“앞서 말한 부채 청산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더 큰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입니다. 광복회가 왜 존재해야 할까요. 광복회는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단체입니다. 그리고 선열들의 독립 정신이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이고요. 광복회 회훈(會訓)인 ‘민족정기 선양, 통일조국 촉성, 자존품위 제고’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광복회의 최종 목표입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광복회는 이익 단체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국민이 광복회에 실망한 것도 이익 단체처럼 서로 싸우기만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회장은 조직 정상화에도 힘쓰고 있다. 지난 1년간 광복회는 회장이 바뀔 때마다 ‘자기 사람 심기’로 큰 몸살을 앓았다. 이 회장은 취임 후 곧바로 이런 난맥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외협력국을 신설하고 총무국장 인사도 공모를 통해 진행하는 등 내부 혁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외협력국 신설에도 적잖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싶은데요.
“무엇보다 광복회가 영역을 넓혀 해외로 뻗어 나가기 위한 조치입니다. 해외에는 지금도 우리가 챙겨야 할 독립운동 단체와 후손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공사를 지내신 분을 어렵게 대외협력국장으로 모신 만큼 조만간 해외에서도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보훈단체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한층 강화하고 광복회가 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외부에 알릴 생각입니다. 대외협력국 신설은 기존 정책실에서 맡던 수익 사업 우선 기조에서 벗어나 정체성 확립이란 광복회 본연의 목표에 충실하려는 첫걸음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일본도 대외 협력 대상에 포함되는지요.
“저는 일본 제국주의는 규탄해야 마땅하지만 일본 시민들 전체를 우리의 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광복회를 찾아온 일본인 헌법학자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당시 우리 국민을 얼마나 잔인하게 지배했는지 연구해 책으로 써냈더라고요. 그래서 그분에게 ‘참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이 일을 계속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더니 그분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에 사과만 요구할 게 아니라 이처럼 일본 학자가 직접 나서서 제국주의 폐해를 고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와 국민에게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광복회도 이런 사례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널리 소개할 계획입니다.”

일 제국주의 규탄, 시민을 적으로 여겨선 안돼

정치 원로 입장에서 요즘 여의도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21대 국회는 실패한 국회라고 봅니다.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국회의원은 여야를 불문하고 반성문부터 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이는 국회가 입법권을 남발했고 여야 사이에 대화와 타협이 실종됐음을 의미합니다.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후배 의원들에게 고언을 해주신다면.
“국회는 대화가 끊겨선 안 됩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도 이념과 사상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었더라도 항일 투쟁할 때는 모두 힘을 합쳤습니다. 반면 국내외적으로 엄중한 시기임에도 21대 국회는 통합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여야가 단 한 번 타협한 적이 있는데 바로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할 때입니다. 그건 정말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 좋은 사례가 있으니 제발 지금이라도 여야가 국익을 우선하는 정치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의 보훈 정책과 관련해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지요.
“대선후보 시절 국가보훈처를 보훈부로 승격하는 안을 제가 제안했고 결국 결실을 맺었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 때도 안철수 인수위원장에게 당부했더니 안 위원장도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납니다. 보훈을 중시하는 윤 대통령의 일관된 철학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올해 광복회 개혁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광복회 개혁 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해 기획위원회를 출범시킬 예정입니다. 대의원회와 지도부는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외부의 명망 있는 분들도 적극 모셔와 정관·복지·의료·교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개선 방안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광복회 개혁은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 인터뷰 전문은 19일 발간되는 월간중앙 7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4선 의원·정무장관·국정원장…보수는 물론 진보 정권서도 중용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3월 이종찬 신임 안기부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8년 3월 이종찬 신임 안기부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이종찬 신임 광복회장은 독립운동가였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해 장교로 복무하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기획조정실장 등을 지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한 이 회장은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에서만 내리 4선(11~14대 국회의원)에 성공하며 중견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이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지냈을 땐 진보 진영에서도 이 회장의 대화와 타협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전해진다. 노태우 정부 때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299석 중 12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반면 김대중(DJ) 총재가 이끈 평화민주당은 70석, 김영삼(YS) 총재의 통일민주당은 59석, 김종필(JP) 총재의 신민주공화당은 35석으로 절반을 넘었다.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정국의 등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이 끝나고 한 달여 뒤 이 회장을 정무 제1장관에 전격 발탁했다. 그에게 야당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라는 중책을 맡긴 것이다.

하지만 ‘3김’이란 걸출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던 야당과의 협상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임명되자마자 야당 대표와 중진들을 설득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고 찾아갔고 결국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며 “이런 모습이 21대 국회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DJ 정부에서도 중용됐다. 1997년 12월 15대 대선에서 승리한 DJ는 이 회장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임명한 데 이어 국정원장이란 중책까지 맡겼다. 이 회장은 2000년 DJ가 노벨 평화상을 받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련도 적잖았다. 국정원의 언론 대응 시나리오를 담은 ‘언론 대책 문건’ 유출 파문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2000년 16대 총선에선 종로에 출마해 낙선했다. 이후 우당기념관을 운영하며 정계와 거리를 두던 이 회장은 지난해 대선 때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등 보폭을 조금씩 넓혔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윤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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