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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옹기종기 모인 사물들의 정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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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호 31면

벽, 경기도 고양, 1975년, ⓒ김녕만

벽, 경기도 고양, 1975년, ⓒ김녕만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그 집이 지금 밥을 하는지 죽을 쑤는지 그 속을 다 알던 시절에는 이웃끼리 애써 서로 숨길 것도 없고 숨겨지지도 않았다. 낮은 담장 너머, 때로는 아예 담조차 없어 안과 밖의 경계, 나와 이웃 사이의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니 터놓고 살았다. 모든 물건이 수납장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요즘과 달리 50년 전 시골에서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얼른 손에 잡기 쉬운 곳에 나와 있었다. 서로서로 무엇을 가졌는지 다 알고 있으니 우리 집에 없는 물건은 옆집에서 빌려 쓰면 그만이었다. ‘공유’의 개념이 그 시절엔 저절로 실현된 셈이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보아도 이 집의 사정이 한눈에 빤히 들어온다. 칫솔 6개가 걸려있으니 아마 식구는 6명 정도일 것이고, 요강이 두 개인 걸로 미루어 방은 두 개 이상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가는 체와 성근 체, 작고 큰 항아리, 새로 묶어놓은 빗자루와 맷돌, 쌀을 이는 조리와 성냥까지 부엌이 아닌 이곳에 죄 나와 있다는 것은 부엌보다 마당에서 더 자주 쓰인다는 뜻이리라.

이 벽을 바라보면 예전에 어머니가 뒷마당에 가꾸시던 채마밭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정갈한 손끝이 닿는 것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싱싱하고 보기 좋았는지. 고추·상추·가지·토마토·오이가 다투어 열매를 맺었고, 채마밭 옆 자투리땅에선 분꽃과 맨드라미·봉숭아가 꽃망울을 터뜨려 늘 뒷마당이 환했다. 여기,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은 항아리와 요강에서도 어머니의 깔끔한 손길이 느껴진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다. 벽면을 반으로 나누는 선과 네모반듯한 문짝은 직선인데 항아리도 요강도 맷돌과 맷방석도 그리고 소쿠리와 프라이팬도 다들 동글동글 원만하여 서로 다른 것들끼리 옹기종기 모인 채마밭이나 꽃밭처럼 예쁘고 정겹다. 그리고 어찌 보면 각진 것과 둥근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 같기도 하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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