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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술과 달의 시인 이백, 키르기스스탄에 등장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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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고향 논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17년 6월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작은 산악국가 키르기스스탄에서 특별한 우표가 발행됐다. 중국과 수교 25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였다. 흥미롭게도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얼굴이 보인다.

이백의 고향은 그동안 중국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데 최근 중국이 중앙아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원을 넘어 실크로드로 뻗어가려는 중국의 의도가 담겨 있다.

“중앙아시아 출신” 최근에 공식화
호탕한 문학 세계도 서역인 닮아

문화혁명 때 “분명한 한족” 규정
구소련과의 관계 악화도 작용해

일대일로 내세우며 “다시 서역인”
중앙아 진출, 위구르 억제 이중성

키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난 시인

중국 쓰촨성(四川省) 멘양(綿陽)에 있는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조각상. 달과 술의 시인을 표현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중국 쓰촨성(四川省) 멘양(綿陽)에 있는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조각상. 달과 술의 시인을 표현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당나라 시인 이태백(701~762)의 본관은 롱서(隴西, 지금의 간쑤 지역)이고, 그는 주로 현재의 쓰촨 지역에서 살았다. 한데 그가 태어난 곳은 쇄엽성(碎葉城)으로,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시키크에서 동쪽으로 좀 떨어진 톡목이라는 도시 근처다. ‘쇄엽’ 이름 자체가 페르시아어를 음차한 것으로, 현재는 ‘수야브’로 불린다. 그의 출신에 대해 중국 학계에선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20세기 초반 역사학자 천인커(陈寅恪)가 “이태백은 서역 계통 호인 출신인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크라스나야 레치카 성터. 이백이 태어난 쇄엽성으로 추정된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크라스나야 레치카 성터. 이백이 태어난 쇄엽성으로 추정된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그런데 문화혁명이 뜨겁던 1971년 궈모뤄(郭沫若)는 『이백과 두보』를 내면서 이태백은 한족이라고 못박는다. 역사학자 궈모뤄는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에 부총리와 과학원장을 지내며 중국 문화정책을 좌우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성(詩聖)’ 두보보다 이백을 더 높게 평가하며 이백은 한족이라고 주장했다.

이백이 한족이라고 내세운 배경에는 당시 중국의 복잡한 상황도 작용했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당시 중국과 소련은 심각한 국경분쟁을 겪었다. 양국 관계도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당시 키르기스스탄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영토였다.

중국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

2017년 키르기스스탄이 발행한 이태백 기념 우표.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2017년 키르기스스탄이 발행한 이태백 기념 우표.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소련 땅에서 태어난 이백이 중국 문학의 기틀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중국에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의 관계를 의식한 궈모뤄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중국은 이후 1970~80년대에 간쑤·쓰촨·산둥성 등 이백의 가계에 등장하는 여러 연고지를 꺼내들며 이백을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몰아갔다.

이태백이 태어난 톡목에서 발견된 기독교-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 부라나박물관에 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이태백이 태어난 톡목에서 발견된 기독교-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 부라나박물관에 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이백의 정확한 출생지를 밝히기는 어렵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순수한 중국인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나중에 알려진 그의 세계(世系)는 중국에 정착한 이후에 새로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증거인 아버지의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그의 아버지는 장군, 혹은 상인이었다고 한다. 이름마저 가명인 듯 이객(李客)으로만 전한다. 이백 자신도 아버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한족이라면 이토록 애매하지는 않을 테니 역으로 중앙아시아 출신일 가능성이 더 크다. 혈통·족보를 따지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술과 달을 좋아하고 인생과 세상을 호탕하게 읊은 이백의 시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기질과 가깝다.

일대일로와 함께 등장한 이태백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이태백’.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이태백’.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한동안 중국에서는 이백이 중앙아시아 출신이라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200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신장 지역으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위구르인을 억제하면서다. 일대일로를 내세우며 중앙아시아와 협력을 강조하면서 이백도 자연스럽게 부각했다.

2010년대 중국 신장과 키르기스스탄 일대에서는 이백을 조명한 학술대회가 잇따랐다. 이백의 고향과 유목민적 호방함을 널리 알렸다. 중국 사업가들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톡목에 ‘이태백 박물관’에 세우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중국이 급변한 배경에는 신장 위구르인에 대한 관리가 있다. 중국은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위구르인을 철저히 통제해왔다. 위구르인과 튀르크계 이슬람과의 연대를 막으려 키르기스스탄의 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키르기스스탄이 중국에 기운 이유

쿠르만잔 닷차(왼쪽 둘째)와 러시아 탐험대의 기념사진. 왼쪽이 돈황문서를 조사한 폴펠리오, 맨 오른쪽이 핀란드 초대 대통령이 된 만네르하임이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쿠르만잔 닷차(왼쪽 둘째)와 러시아 탐험대의 기념사진. 왼쪽이 돈황문서를 조사한 폴펠리오, 맨 오른쪽이 핀란드 초대 대통령이 된 만네르하임이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키르기스스탄이 중국의 속셈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중국과의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사정이 있다. 키르기스스탄은 농토가 7%밖에 안 되는 산악국가다. 한반도만한 땅에 인구가 600만에 불과한 이유다. 금광을 제외하면 부존자원도 빈약한 편이라 경제 자립이 어렵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유목민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가장 험난한 지역에 살던 키르기스인들이 정작 마지막까지 남아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기민한 외교적 판단 덕분이었다. 19세기 말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던 당시 키르기스스탄은 청나라와 우즈베키스탄 코칸트 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키르기스의 마지막 여성 통치자 쿠르만잔 닷카(1811~1907)는 러시아의 팽창에 합류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후 소련에 편입돼 키르기스스탄공화국의 기틀을 세웠다. 반면 주류를 차지했던 준가르·카르칼팍·코칸트 등 당대의 강대한 세력은 흔적만 남게 됐다.

키르기스스탄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다시 열악한 상황에 놓였다. 소련 시절 ‘게리멘더링’으로 만든 국경 탓에 민족 간 갈등도 격화했다. 2005년, 2010년에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국경도시인 오시와 안디잔에선 수십만 피해자가 발생한 폭력사태도 일어났다.

세계문화유산 실크로드 논란

8세기경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키르기스인의 석인상. 비시케크박물관에 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8세기경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키르기스인의 석인상. 비시케크박물관에 있다. [사진 바이두, 위키피디아, 강인욱, 중앙포토]

이런 상황에서 키르기스스탄은 중국과 접하고 있다는 이점을 활용하여 고속철도 건설 및 다양한 교역으로 활로를 찾게 됐다. 중앙아시아 세력 균형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소련의 몰락 이후 키르기스스탄의 선택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백과 실크로드를 매개로 한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협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이어졌다. 2014년 두 나라는 중국 시안에서 텐산(天山) 산맥에 이르는 실크로드 캐러밴 루트를 연결했다. 그 안에는 이백이 태어난 쇄엽성과 관련된 악-베심, 부라나 탑 등의 유적도 포함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는 가장 넓은 지역을 관통하는 이 실크로드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캐러밴 루트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실제 선정 목록에는 그와 관계없는 중국 내 유적이 다수 포함됐다. 실크로드 주변국과의 합의를 깨고 중국이 유네스코 회의를 주도한 결과였다.

문화적 개방성, 이태백의 진가

이태백이 살던 8세기 쇄엽성은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 이는 고고학 발굴로도 확인됐다. 쇄엽성과 주변 유적에서 불교·기독교·이슬람 유물이 함께 출토됐다. 당나라 현장 법사가 불경을 얻기 위해 서역을 갔을 때도 쇄엽성이 등장하고, 8세기 중엽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이 전파되는 계기가 된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도 이곳에서 멀지 않다.

중국을 대표하는 이태백 문학은 이렇듯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실크로드의 영향이 컸다. 이백이 발해의 문자를 풀었다는 이야기와 기록이 전해질 정도다. 이백이 발해 문자를 풀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만큼 이백이 여러 문화에 정통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른바 다문화성의 결실이다.

중국이 중앙아시아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신장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이태백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모순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여러 민족의 화합을 강조하면서 정작 중국 내에서는 한족 중심의 사회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방인 이백이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 문화의 개방성 덕분이 아니었는가.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