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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주의 망령과 악성 팬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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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학연·혈연·지연이 탈선하여 빚어내는 문제는 한국 사회의 오래된 고민거리다. 공정한 경쟁과 건강한 공동체감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학교와 학벌, 가족과 핏줄, 출생지와 지역을 고리로 한 공식적·비공식적 연대에 의한 불공평한 대우와 차별은 우리 공동체를 좀먹는 암적 존재다.

학연·혈연·지연의 연고주의는 풍토병이 되어 여전히 음습하게 살아 움직이며 선진 대한민국을 폄훼하고 조롱한다. 아들딸과 동료의 자녀에게 직장을 세습해 온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생생한 자화상이다. 아빠 찬스가 개입된 조국 사태는 남북분단만큼이나 공고하게 우리 사회를 진영의 갈등 대치로 몰아넣었다. 겉으로는 노동자 생존권과 민주 노동을 내세우면서 자기편 조합원을 채용하라고 소음과 사보타주와 법을 악용하는 압력을 가하고 난투극마저 벌이는 거대 양대 노총도 마찬가지다.

차별과 편견을 증폭하는 ‘개딸’
이들을 두둔하는 일부 정치인
민주주의 위협하는 전체주의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연고주의 망령만으로 이미 힘겨운 우리 사회에 무책임한 정치 팬덤들의 ‘괴롭힘’이 또 다른 망령으로 가세하고 있다. 정당의 존재 이유인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태도와 폭력적인 집단 언어와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고 있다. 이견과 비판은 적군으로 매도하고, 생각의 차이를 다름이 아니라 공존할 수 없는 적폐 세력으로 규정하는 차별주의의 편견을 노골적으로 쏟아낸다. 근래 민주당에서 논란의 대상인 ‘개딸’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개딸은 특정 의원들을 ‘수박’(겉은 민주당, 속은 국민의 힘이라는 은어)으로 낙인찍으며 진짜 수박을 발길질로 짓밟고 으깬다. 의원들이 압도적으로 선출한 원내대표에 대해서도 선호한 의원이 아니라고 ‘수박’으로 비난한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의원에게는 조롱을 일삼으면서 돈봉투 관련 의혹을 받는 전 대표(송영길)가 귀국하는 공항에서 ‘청렴하다’는 고함으로 면죄부를 부여한다. 나랏일을 다루는 국회 상임위가 열리는 도중에 이석하여 코인거래라는 자기 일에 몰두한 의원(김남국)을 “영리한 투자 성공사례”라면서 “크게 될 정치인의 시련이라 생각하고 당원들만 믿고 정진하시라”는 낯 뜨거운 댓글을 도배한다.

개딸의 안하무인 질주에는 입만 열면 군부독재를 끊어낸 민주주의의 상속자를 자임하는 민주당과 의원들의 소심함이 있다. 일신상의 안위를 정당의 민주적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중하게 여기는 비겁함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가장 큰 뒷배는 개딸의 활약(?)을 정당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칭송하는 일부 정치인들의 두둔과 이용이다. 2022년 5월 14일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후보(이재명)는 개딸 현상에 대해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행태”라고 했다. “역사는 다수가 만드는 게 아니다. 역사는 소수가 만드는 것”이고 “그게 세상을 바꾼다”라고도 했다. 물론 “과대망상도 아니고, 팬덤 정치로 망했는데 세계사적 의미까지 부여해 가며 팬덤 정치를 계속한다는 것은 대단히 해괴한 일”(진중권)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먼 옛날 소크라테스는 이런 해괴함의 수사술을 ‘아부의 기술’이라고 격하했다.

개딸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들의 생각을 폭력적 언어와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주장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장은 “자신의 의도, 목적, 입장을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통해 상대의 생각·의견·태도·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변화를 모색하는 설득 행위”(『소통하는 인간』, 김정기)로 민주적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언어폭력은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거나 변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공격하여 상처를 주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느끼게 하는 행위로 인격이나 능력에 대한 폄하, 모욕, 악담, 상말, 막말, 괴롭히는 말, 조롱, 저주, 욕설처럼 직접적인 공격과 심리적으로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Verbal aggressiveness』, Infante & Wigley). 표현의 자유를 전제해도 맥락에 따라서 범죄행위로 민주주의를 위해 백해무익한 행위이다.

정치 팬덤은 무슨 ‘세계사적 의미’나 ‘역사의 선지자’ 운운에 휘둘리지 말고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를 위해 “더 좋은 반대와 더 좋은 찬성”(『디베이트』,디베이트, 서보현)의 방안을 모색하는 논쟁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열중해야 한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치 팬덤의 폭력적인 언행은 또 다른 연고주의 풍토병일 뿐이다. 정치인들도 악성 정치 팬덤을 부추기는 모든 아부를 멈추어야 한다. 칼과 총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목소리만 떠받드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더 큰 위협이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