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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하수는 겁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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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검은 돌 흰 돌

검은 돌 흰 돌

바둑판에 도덕은 없다. 세상의 선과 악은 없고 대신 좋은 수와 나쁜 수가 있다. 그 덕분에 가치판단이 쉽고 사실에 빨리 다가갈 수 있다. 복기를 통해 패착과 승착, 무리수와 완착을 찾아낼 수 있고 다양한 ‘팩트 체크’가 가능해 착각이나 미망에서 금세 벗어날 수 있다. 바둑판 위에 가짜뉴스는 존재할 수 없다. 교묘한 가짜가 망령처럼 세상을 흔드는 이 시대에 이런 것들이 자그마한 위안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건 고수들의 얘기다. 하수들의 세상엔 온갖 착각과 고집이 판을 친다. 모르는 것투성이라 매번 망설이지만 때로는 빗나간 고정관념이 빗나간 수순을 만들어내고 그게 옳다는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는다. 동네 기원이나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옛 바둑책 『현현기경(玄玄棋經)』을 보면 “고수는 교만함이 없고 하수는 겁이 없다(高者無亢 卑者無怯)”는 대목이 나온다. 『현현기경』에 온갖 좋은 말이 많지만 나는 이 대목을 좋아한다. 알 듯 모를 듯해서 더 좋아한다. 아마도 이 여덟 글자는 교만함이 없는 고수보다는 겁 없는 하수에 방점이 찍혀있는 듯 보인다. 이 이야기는 언뜻 겁을 먹는 게 당연하며 겁을 안내는 게 미덕이 아니라는 소리로도 들린다.

겁쟁이는 비겁하다. 용기는 아름답다. 미덕이다. 그렇다면 겁 없음은 아름다움과 통하는 것 아닌가. 한데 왜 하수는 겁이 없다는 것일까.

어린아이는 겁이 있을까 없을까. 많을까 적을까. 앞일을 모르면 겁이 나지 않을까, 아니면 더 겁이 날까. 겁이 나지만 용기를 낸다는 것과 겁을 애당초 모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수는 겁이 없다는 이 문장은 골치 아프다.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있는데 선악의 판정은 불가능하다.

바둑에서는 반전무인(盤前無人)이란 네 글자를 승부에 임하는 최고의 경지로 친다. 바둑판 앞에 아무도 없다는 것인데 어찌 아무도 없을 수 있으랴. 내 앞에 소문난 강자가 앉을 수도 있고 평소 밥으로 여기는 상대가 앉을 수도 있다. 강자가 앉아있다면 겁이 난다. 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승리 확률은 0%로 수렴한다. 그게 승부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반전무인은 겁먹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반전무인은 그걸 뛰어넘어 아예 내 앞에 누가 앉았는지 의식하지도 말라는 것인데 그건 아마도 도를 통해야 다다를 수 있는 영역, 인간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수는 겁이 없다는 대목으로 돌아간다. 이 구절을 가장 쉽게 풀이해본다면 수읽기가 안 되니까 앞날의 변화, 특히 비극적 결말을 알 리 없고 그래서 ‘겁이 없다’가 된다. 그러나 바둑판을 잠시 떠나 그 품을 세상의 바둑판으로 넓히면 ‘겁 없는 하수’가 이루어 낸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생각하면 인류 역사의 수많은 위인들이 겁 없는 하수였다.

바둑에서도 같은 능력이라면 한 살이라도 어린 편이 승률이 좋다. 모르고 휘두르는 겁 없는 칼이지만 그 겁 없음이 파괴력을 만들어낸다.

고수는 교만함이 없고 하수는 겁이 없다. 이 미스테리한 문장에서 문득 떠오르는 조합이 있다. ‘교만한 하수’라는 조합이다. 고수는 교만함이 없어야 진짜 고수라지만 사실 교만한 고수도 꽤 있다. 한데 실제로는 하수인데 스스로를 고수의 반열에 올려놓으면 교만한 하수라는 최악의 조합이 성립한다.

겁 없는 하수는 종종 세상을 바꾼다. 그러므로 하수는 겁이 없다는 이 문장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선악의 판단은 없다. 그러나 교만한 하수는 어찌 되나. 바둑판의 문제는 바둑판 안에서 끝나니까 신경 쓸 것 없지만 세상이라는 바둑판에선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세상에선 나를 포함해 우리 대부분은 하수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겁 없는 하수인가, 겸손한 하수인가. 아니면 교만한 하수인가.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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