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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최정례 ‘호랑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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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소연 시인

김소연 시인

오늘도 나의 산책길에서는 개와 개가 만나 뺨을 대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냄새를 맡는 모습을 주인은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귀엽다, 점잖다” 하며 모르는 개와 모르는 그 주인에게 말을 건넨다. 나도 슬며시 끼어들어 개에게 인사를 한다. 네발짐승이 도시의 산책로에 함께 하는 모습. 인간과 비인간이 가족이 되어 일상을 함께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 되었다. 나는 동네 주민 동물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 일부러 해질녘을 골라 산책을 나선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시 속에 동물들을 가장 자주, 가장 다양하게 불러들인 시인을 꼽으라면 최정례 시인이 우선이다. 시인이 남긴 여섯 권의 시집 중 세 권의 시집 제목에 이미 동물 이름이 등장한다. 『햇빛 속에 호랑이』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호랑이와 캥거루와 용 이외에도 나귀, 얼룩말, 토끼, 소, 수사슴, 코끼리, 고슴도치 등등. 동물과 조우하는 그 순간에 시인에게는 시인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모든 인간들이 소거되다시피 한다. 오직 동물과 시인만 남는다.

‘햇빛 속에 호랑이’라는 시에서는 시인은 ‘지금 두 손 들고 서 있’다. ‘빠빳한 수염털 사이로 노랑 이그르한 빨강 아니 불타는 초록의 호랑이 눈깔을’ 주시하고 있다. 시는 주어를 군데군데 교묘히 숨기면서, 얼핏 읽으면, 호랑이가 시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인지, 시인이 호랑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수 있게 장치돼 있다. 마치 호랑이는 시인을 잡아먹을 기세다. 시인은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시는 호랑이들이 우글우글하게 많아지며 끝을 맺는다.

어쩌면 시인은 지글대는 땡볕을 호랑이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눈부신 햇빛 속에 호랑이를 착시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시인은 호랑이를 이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세워두었다. 한밤중에 캥거루와 시인의 유사성에 대해 골몰하고, 고슴도치에게 시를 읽어주듯이.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