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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혜명의 파시오네

아직도 종교가 예술을 움직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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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강혜명 성악가(소프라노)

강혜명 성악가(소프라노)

수도권을 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하게 문화예술 활동이 일어나는 곳을 꼽는다면 어디일까. 공연예술계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대부분 대구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만큼 대구는 국내 문화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페라·뮤지컬 공연이 활발하다.

최근 대구 예술계가 또 다른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특정 작품, 특정 단체의 공연을 둘러싸고 종교적 갈등이 일었다. 공연 무대에 종교적 편향성이 있다며 공연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었다. 엄밀히 말해 이번 사안은 예술계의 종교적 갈등이 아닌 종교계의 예술적 갈등에 가깝다.

대구서 베토벤 ‘합창’ 공연 논란
“종교 편향적” 시립단체에 불허
종교의 생명은 화합의 메시지

대구시립합창단의 공연 모습. 대구 수성아트피아 재개관 기념 무대에서 베토벤의 ‘합창’을 부를 예정이었으나 작품의 종교 편향성 논란이 일었다. [사진 합창단 홈페이지]

대구시립합창단의 공연 모습. 대구 수성아트피아 재개관 기념 무대에서 베토벤의 ‘합창’을 부를 예정이었으나 작품의 종교 편향성 논란이 일었다. [사진 합창단 홈페이지]

대구 수성아트피아는 지난 1일 재개관을 앞두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선보였다. 계획대로라면 대구시립예술단이 무대에 올라야 했지만, 대구시가 공연 참여 불가 의사를 전달하며 성사되지 않았다. 대구시의 이번 방침은 2014년 출범한 예술단 자문기구인 종교화합자문위원회의 조례에 따라 결정되었다. 종교화합자문위원회는 종교 편향 공연 방지를 위해 만들어졌다. 종교화합이라는 명칭은 예술단체 자문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간 대구 시립예술단체의 활동이 종교적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번에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교향곡 ‘합창’에 나오는 특정 단어(창조주)와 표현이 선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종교 편향적 갈등을 조장한다는 것이었다. 예술단체의 활동이 종교적 기준에 따라 재단된다는 현실을 이해하기 어렵다.

시립예술단의 ‘편향적’인 예술 활동이 공공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이는 형평성과 중립성의 문제일 것이다. 형평성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면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중립성은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의 본질과 거리가 먼 개념이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종교화합자문위원회가 자문이란 영역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정족수 위원들의 전체 동의가 없을 경우에 예술단의 공연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 예술이 종교의 지배를 받던 유럽의 중세 시대마저 떠올랐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듯이 표현의 자유 또한 핵심적인 가치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립단체가 공공의 이익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뜻이 전혀 없다. 하지만 예술의 공익성을 판단한다며 종교의 이름으로 예술의 고유성을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대구시에서는 시립예술단 종교화합위원회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자문위원 전원 찬성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성격이 있었음을 인정한 조치로 풀이된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예술단으로서 종교 중립 의무 준수는 필수인 만큼 실효성 있는 시립예술단 종교 편향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예술계·종교계 간 소통과 화합을 강화해 나가겠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일부 종교계의 반발이 예고되며 논란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2017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방문한 적이 있다. 10주년을 맞는 베이루트 국제 음악축제의 솔리스트로 초청되었는데, 이때 출연했던 공연이 바로 베토벤의 ‘합창’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 20여일간 진행된 음악 축제를 빛냈다. 선우예권과 세르게이 카타트라이안, 에드가 모로 등이 함께 어울렸다. 개막 공연은 세인트 조지 대성당에서 열렸다.

리허설 준비를 위해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성당 앞의 이슬람 사원을 보고 조금은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베이루트는 극심한 종교 갈등에 따른 내전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알 아민 모스크와 세인트 조지 성당은 종교 화합의 상징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실제로 알 아민 모스크와 세인트 조지 대성당은 서로 창문이 내다보이는 낮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공연을 업으로 삼으면서 비교적 어린 나이부터 여러 도시를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이중 베이루트 공연을 각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는 이슬람 국가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곡을 연주해서가 아니다. 베이루트 시내만 잠시 벗어나도 무너진 외벽 곳곳에 박힌 총알 자국이 무수한 나라이지만 예술과 종교가 저마다 기능을 다 하며 총성의 세상에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잠시 다녀가는 이방인의 마음도 뭉클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다. 우리에게도 아직 평화를 노래해야 할 많은 이유가 남아 있다.

강혜명 성악가·소프라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