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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불 밝혀 이어갈 일이 있다는 듯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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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호 31면

병산서원 향사, 2012년. ©이동춘

병산서원 향사, 2012년. ©이동춘

봄밤이다. 초승달을 사이에 두고 목성과 금성이 일렬로 나란하다. 기와지붕 아래 도포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궁금한 듯 잔가지를 세운 매화나무 그림자가 대청을 향해 기울었다. 하늘에 달과 별이 운행하는 것처럼 땅에서도 불 밝혀 이어갈 일이 있다는 듯, 창호지 너머가 환하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사진을 찍은 사진가의 자리를 떠올린다. 그는, 아니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저 한 장의 사진을 얻기까지,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며 달과 별이 제자리에서 빛나고 밤하늘이 알맞게 푸르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고요하면서도 동감이 드러나는 때를, 서원 좌우 방들의 불빛이 사진 프레임의 양옆에서 꺼지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이다.

사진가 이동춘(李東春). ‘동춘당’처럼 한옥의 택호로 불러도 될 것 같은 드문 이름과 어울리게도 오랜 세월을 우직하게 고택과 종가, 서원 등 우리 문화의 원형을 기록해 왔다. 그녀가 찍은 이 사진은 ‘병사서원 향사’ 중 ‘분정’의 모습이다. 병산서원은 향사라 하여 봄·가을로 서애 류성룡 선생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데, 서애 선생 문중의 후손들과 제야의 유학자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다. 이른 아침부터 제사 준비를 하고 선생의 삶과 가르침을 밤늦도록 되새기다, 다음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 준비의 일부로서, 모인 사람 가운데 누가 술잔을 올리고 누가 받들고 누가 받아 놓을지를 정하는 과정이 분정이다. 순서가 정해지면 글 쓰는 소임을 맡은 이가 단정히 꿇어앉아, 벼루에 먹 갈아 한지에 이름자들을 쓴다.

하늘과 달과 별, 우주와 그 아래 집 한 채. 먼 옛사람을 잊지 않고 돌아가신 날을 기억했다가, 의례와 예로써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일이 40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아랫녘 어딘가에서 저 오래된 풍경이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저 풍경을 찍기 위해 만대루에 홀로 앉아 새벽닭이 울 때까지 기다림을 이어가는 사진가가 있다 생각하면, 허둥지둥 뜬 마음이 가라앉는다.

29일은 병산서원 향사가 있는 날이니, 안동의 하늘 아래 다시금 사진 속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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