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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사회문제 해결과 국가재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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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십여년 전의 일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호텔 카페에서 『노동의 종말』, 『수소혁명』, 『소유의 종말』, 『공감의 시대』 등으로 유명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자신을 미래학자로 부르지 말고 사회혁신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미래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대안을 찾다가 미래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니 한 시간 예정 인터뷰가 세 시간으로 늘어났다.

리프킨은 대학 졸업 후 취업보다 사회혁신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대학 시절 월남전 참전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던 운동권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들을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세수 증대에도 심각한 재정 적자
3대 개혁보다 더 중요한 재정개혁
포퓰리즘 재정운영 유혹 벗어나
사회봉사 선순환 시스템 만들어야

많은 이야기 가운데 흥미로웠던 것은 인류의 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2030년이나 2040년 정도가 되면 주 삼일 근무제가 된다는 것이다. 1940년대 미국도 주 70시간 노동을 했지만 이제 40시간 이하가 되었고 북유럽은 주 30시간 정도 일을 한다. 주 삼일 근무가 되면 나머지 이틀 정도는 자신의 취미활동을 하고 이틀 정도는 사회봉사나 종교활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산업사회가 지나가고 디지털 지식사회가 되면 시간으로 일하기보다는 머리로 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정치권이 아직도 노동시간을 갖고 정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 미래에 대한 안목이 부족해 안타까울 뿐이다.

운동권 출신이지만 사회문제 해결에 국가재정이 투입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사회가 선진화하면 국가가 나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개인들이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쥬는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단체들은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어야지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심각한 사회문제인 저출산에 대해서도 국가재정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사회가 같이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 영유아를 돌보아주는 어린이집은 기본 보육이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지만 연장보육을 신청하면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바쁘게 사회활동을 하는 젊은 부부들은 이 시간도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손주 등하원을 부탁할 수밖에 없다.

혹시 돌봄 서비스를 24시간 가능하게 하면 안 될까? 리프킨의 아이디어를 빌리면 이렇게 하면 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기 손주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도 보육원에서 여러 아이를 함께 돌보아 주는 보육 봉사활동을 하고, 마치 헌혈한 것처럼 그 봉사시간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나이 들어 요양 서비스를 받을 때가 되면 그 시간만큼 간병인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헌혈증서처럼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에 기록해서 평생 다양한 봉사시간을 축적해 필요할 때 활용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보육지원도 노인 요양도 국가재정으로 지원한다.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의 사고가 아직도 넘쳐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국가재정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해왔기 때문에 이들 국가는 적자재정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정부예산의 삼 분의 일을 빚 갚는 데 쓰기도 한다. 정치인들은 국가재정으로 표를 얻는 데 혈안이 되어 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관료들은 무사안일로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한다. 자기 돈 같으면 아껴서 쓸 것을 세금으로 걷은 돈은 인심 쓰듯이 함부로 나누어준다.

지난 정부에서 한 젊은 사무관이 재정적자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기재부를 떠났다. 정치권의 공격은 이 젊은 사무관이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매서웠다. 세계경제의 불황으로 올해 2월 벌써 우리나라 재정적자가 30조원을 넘었다. 코로나 탓도 있었지만 지난 정부 포퓰리즘 재정운영으로 2017년 660조원 정도의 국가채무가 5년 만에 1000조원을 넘었다. GDP대비 국가 순채무비율이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낮아지고 있는데 지난해 우리나라는 2019년 대비 두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우리나라 세금수입은 부동산 폭등, 법인세 증가 등으로 2018년 283조원에서 2022년 384조원으로 지난 정부 4년 사이에 35% 이상 증가해 100조원 이상 늘어났다. 그런데 국가채무는 같은 기간 400조원 가까이 늘어났다. 이처럼 늘어난 세금 수입에도 채무가 증가한 것은 국가의 포퓰리즘 재정운영 때문이다.

이제 기획재정부는 세수확보에만 혈안이 되기보다는 재정지출을 줄이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돈은 많이 버는 것보다 절약하며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금 정부도 표를 의식해서 포퓰리즘 재정운영의 유혹을 벗어버리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과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재정개혁이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