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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경쟁이 아닌 선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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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나는 속초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 거기에서 가장 오래된 집에 살고 있다. 어찌하다보니 200년 가까이 된 한옥을 사서 수리해 9년 넘게 살고 있다. 이 집 앞 대포항에서 설악동까지 10㎞ 길이 큰 길이 있는데, 여기에 족히 30년은 넘은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여기 벚꽃은 다른 데서 이미 다 피고 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4월 5일 즈음이 딱 절정이다.

벚꽃 개화도가 있다. 3월 20일 즈음 가장 남쪽 제주도를 시작으로 강원도 북부에 도착할 때가 대략 4월 5일. 평창·인제 등 산 속은 더 늦다. 다른 꽃보다 유난히 벚꽃이 우리 기억에 많이 남는 이유는 그 어마어마한 꽃의 양 때문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잎이 없는 상태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유난히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벚꽃뿐만 아니다. 잎보다 빨리 꽃을 피우는 진달래·개나리·히어리 등이 늘 꽃으로 먼저 기억된다.

행복한 가드닝

행복한 가드닝

그에 반해 산딸나무·이팝나무·밤나무·배롱나무·칠엽수 등 여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잎이 무성해진 채로 꽃을 피운다. 그래서인지, 자연 속에서는 봄꽃보다 여름꽃이 휠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잎 속에 파묻힌 여름나무 꽃은 그리 잘 기억되지 않는다.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전년도 가지에 이미 꽃과 잎을 피울 에너지를 비축한 채로 겨울을 난다. 대신 여름나무들은 잎을 먼저 틔운 후, 열심히 광합성 작용을 하여 꽃을 피운다. 이걸 원예에 적용해보면 가지치기의 시기도 다르다. 여름나무는 이른 봄에 가지를 쳐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이른 봄에 가지를 잘라버리면 그해에는 꽃을 피우지 못하거나 빈약해진다.

식물이 봄꽃·여름꽃 이렇게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는 서로 경쟁을 피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우린 늘 경쟁에서 이기자며 주먹을 불끈 쥐지만, 경쟁을 피해 다른 선택을 하는 지혜도 있음을 잊지 말자.

오경아 정원 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