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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노트

실리콘밸리 해고 칼바람과 실버라이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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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3년 전 미국 본사로 옮겨와서 팀원들을 뽑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한 유능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일을 더 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고용 안정성에 대해 불안해하며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과거 근무했던 직장들의 구조조정으로 본인 뜻과 상관없이 연거푸 회사를 떠나야 했었다. 미국 직장인 2명 중 1명꼴로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를 당한다는 데이터를 보니 그 불안이 이해됐다. 이렇게 해고가 흔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해고된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대형 테크기업 거센 해고 바람
올해 매주 1.5만명 일자리 잃어
테크기업엔 효율 다지는 시간
다른 산업군엔 인재 영입 기회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미국에서는 본인 잘못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해고(fire)와 회사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layoff)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제 2022년과 2023년. 실리콘밸리에는 그야말로 해고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전 세계 거시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경영 효율성이 우선시되면서 작년 말 메타(페이스북 모기업)로 시작된 해고 바람은 재무제표가 탄탄하고 현금 보유량도 많아 큰 걱정 없어 보이던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로 이어졌다. 이 기업들은 각각 1만명, 1만 20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이들에 이어 세일즈포스, 페이팔, 스트라이프, 델 등 중견 기업들도 대량 해고 대열에 참여했다. 미국 해고 데이터(layoffs.fyi)에 따르면 2022년 한해 미국 테크기업에서만 약 16만명의 구조조정 해고가 있었으며, 2023년에는 두 달 동안 약 13만명의 해고가 있었다. 올해 들어 매주 약 1만5000명의 테크 인재들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3월 들어서도 크고 작은 테크 기업들의 추가 해고 발표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주엔 메타에서 2차로 1만명을 더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스타트업들의 자금줄로 그동안 실리콘밸리 혁신의 지지대 역할을 해온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여파로 실리콘밸리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해고 바람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칼바람 속에서도 실리콘밸리를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있다. 일자리 정보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링크드인(Linkedin.com)에서는 최근 테크기업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layoffs’ ‘#opentowork’처럼 해시태그(#)와 함께 본인 해고 상황을 알리며 일자리 정보를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딱한 상황은 비자 문제가 걸려있는 외국인들 경우다. 인도 출신 엔지니어는 “이제 딱 30일 남았다. 30일 안에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가 마른다. 일자리 찾는 데 도움 달라”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에는 100여개 넘는 댓글이 달리며 모르는 사람들조차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봐 주고 연결해주고 있다. 구글을 그만둔 직원들의 알럼나이 모임인 ‘Xoogler(주글러)’는 동료들의 지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글러에서는 구글의 해고 발표가 나자마자 해고된 1만2000명을 대상으로 마인드 컨트롤과 명상 등의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또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킹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어 발 빠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차가운 해고 바람 속에서 따뜻한 인간미와 동료애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대형 테크기업들의 대량 해고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산업계 간 인재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실리콘밸리 테크기업들은 높은 연봉과 카페테리아 공짜 식사나 마사지 등의 최고 복지 시설로 고급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큰 테크기업의 대량 해고에 실망한 인재들은 이제 테크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계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그동안 인재 영입에 목말라 왔던 스타트업이나 다른 산업계에서는 고급 인재 확보에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엔지니어들의 이력서가 들어오고 있다고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테크기업들의 대량해고가 이어진 최근 6개월간 미국의 비(非) 테크 기업에서 약 50만명 이상의 인재 채용이 있었다는 데이터가 나오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해고가 불투명한 거시경제 전망 때문이 아니라 경쟁 회사들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모방 해고(Copycat Layoffs)’라는 비판도 받지만, 이번 대량 해고가 그동안 ‘사람부터 뽑아놓고 보자’ 식으로 달려왔던 테크기업들이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은 확실하다.

인재들의 산업간 이동도 의미 있는 일이다. 구름 뒤에 해가 있을 때 구름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희망의 실버 라이닝처럼, 테크기업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효율성을 다져서 더 큰 혁신을 가져오길 기대한다. 또 자리를 옮겨간 테크 인재들이 다른 산업 부문에서 가속할 혁신도 내심 기다려진다.

정김경숙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