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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성남의 속풀이처방

진정 괴물이 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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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한 도시 주민들이 이슬람 사원 건축 중단을 요구하였다. 대법원의 기각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사원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고충은 이해한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슬람 국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나쁜 소식들을 접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건축을 막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반대하는 방법이 국제적으로 인종차별, 종교혐오 행위라는 오해를 살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주민들은 사원 공사장 앞에서 돼지고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한국은 돼지고기 문화이니 이에 적응하라는 취지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화적 폭력에 준한다.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학대행위이다. 자칫하면 세계적인 가십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우리나라가 외국인 혐오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위험도 크다.

“이슬람 사원 반대” 목소리 우려
인종·외국인 차별로 흐를 수도
혐오감은 ‘악마의 감정’과 닮아
병적인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프랑스 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타락 천사’(The Fallen Angel, 1847). 천사에서 사탄으로 떨어진 루치펠(루시퍼)을 그렸다.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 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타락 천사’(The Fallen Angel, 1847). 천사에서 사탄으로 떨어진 루치펠(루시퍼)을 그렸다. [사진 위키피디아]

혹자는 이슬람사원이 세워지면 탈레반 같은 테러리스트들이 생길 수 있지 않으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슬람교 사람 중에서도 소수에 국한되며, 이슬람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이다. 이슬람교의 문화는 폭력적이지 않다. 반대로 관용적이다. 그들은 길을 가는 길손에게도 차를 대접하고, 여행객들을 환대한다.

중동 지역을 잘 모르는 주민들이 갖는 염려와 걱정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떠오르는 걱정이 있다. 행여나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외국인 배타주의나 혐오감으로 변질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다. 불편감과 혐오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불편감은 대화와 이해로 해소할 수 있지만, 혐오감은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혐오감이 위험한 첫 번째 이유는 살상 욕구를 부추겨 사람을 상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량학살을 저지르게 하는 것도 혐오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이다. 독일인들은 히틀러에 의해서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가짐으로써 유대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학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였다. 혐오감이 양심과 지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사건, 크메르루주 폴포트의 자국민 학살 역시 혐오감정을 부추겨서 일으킨 악행들이었다.

이처럼 혐오감은 집단주의 의식을 심어주고 개인의 생각을 매장하며,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사람을 사나운 짐승으로 변하게 하는 마약 같은 위험한 감정이다. 그래서 사회심리학자들은 혐오감은 평범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드는 위험한 감정이라고 지적하며, 영성론에서는 악마의 감정이라고 하면서 경계할 것을 촉구한다.

혐오감을 갖는다는 것은 역으로 자신들은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병적인 우월감을 갖는 것이다. 병적인 우월감은 병적인 선민의식을 동반하고, 병적인 선민의식은 자신들은 법을 초월한 존재라는 자기망상에 빠지게 한다. 이런 상태를 교만이라고 하는데, 영성심리에서는 ‘루치펠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한다.

루치펠은 하느님의 천사 중 하나였는데 자신을 신격화하는 바람에 사탄이 되어버렸다. 이 루치펠 콤플렉스에 걸리면 자신은 신격화하고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런 현상을 영성심리에서는 마귀에 들렸다고 한다. 병적인 우월감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에 타인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는 것을 경계하라 하는 것이다.

넘치는 혐오감은 국가적 위상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후손들에게 살기 힘든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나라에 누가 놀러 가려 하겠는가. 그런 나라와 누가 거래하려 하겠는가. 코로나 사태 이후 외국에서는 동양인 혐오로 말미암아 폭행 사건이 다수 발생하였고, 그 나라들은 기피 대상국, 후진국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가 그들의 잘못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혐오감은 차별의식에 근거하기도 한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제적 선진국인들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업신여기는 것은 열등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속 좁은 마음으로는 우리나라를 대국으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반으로 동강난 ‘소국’이다. 소국에 사는 우리가 생존하는 방법은 대국이 되는 것이다. 즉 전 세계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국의 땅을 가지고 있지만 대국이 되는 길이며, 이를 위해 관용과 관대함이 필요하다. 소국이 되어서 찌질하게 사느냐, 대국이 되어서 풍요를 누리느냐는 우리 마음가짐에 달렸다.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