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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3·1 독립선언서의 포용정신, 지금 되레 새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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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진정한 독립 가로막는 대일 피해자 의식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19년 3월 1일 만해 한용운은 민족 대표들이 모인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선언을 통해 인류 평등의 대의를 밝히고,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릴 것을 천명했다.

한용운은 이어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돼 10년 동안 받아온 참담한 고통과 아픔을 토로했다.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민족대표 33인, 일본 배제하지 않고 새 세상 함께 만들자고 제안
“지금 할 일은 우리 자신을 세우는 것,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야”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역량 고스란히 담긴 ‘문화 지성’의 결정체
과거사 갈등 근원인 피해자 의식 벗지 못하면 미래로 가지 못해

그런데도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은 일본이 강화도조약 이후 수시로 조선과의 약속을 어긴 것을 비난하지 않았으며, 땅을 빼앗고, 문화 민족을 야만인처럼 대하고, 훌륭한 심성을 무시한 일본의 옳지 못한 행위도 책망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 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순간의 감정으로 남을 시기하여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 배척 대신 진정한 이해 요청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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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2000만 민중의 아픔을 강인한 의지로 감내하며 일본을 원망하고 배척하는 대신, 오히려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일본과 더불어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열자고 했다. 그것은 독립한 조선이 일본·중국과 함께 동양 평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을 실현한 세상이었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중책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또 중국이 일본에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용운은 앞으로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선언서를 마무리했다. 피해 당사자인 민족 대표 33인은 가해자 일본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을 포용하고 함께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러한 포용의 논리가 당시 그들이 신봉한 천도교·기독교·불교 사상과 연관되는 논리 구조는 각각 달랐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포용론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고”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포용론적 선언서를 만들어냈다. 조선 지성 33인은 이 선언서에 역사 공동체의 문화적 역량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은 ‘문화 지성’이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역사 문제로 인해 일본과 심각한 갈등 상황에 빠져 있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 위안부 합의가 유명무실해지고 징용자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본격화한 징용자 문제는 법적 차원을 넘어 정치·외교·경제·군사·안보의 영역으로 갈등이 확산되었다.

그 사이에 정치가는 죽창가를 소환했고 시민사회는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호응했다. 한·일 서로가 반일과 혐한 의식에 사로잡혀 정면충돌하는 상황은 흡사 전쟁 상태를 방불케 했다. 구원(舊怨)을 상기시켜 분노의 감정에 불을 댕기고, 타오른 분노는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며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서로가 입은 상처는 컸다. 오늘날의 파생적 상처가 지난날의 본원적 상처보다 더 아프고 치유하기 힘들게 느껴진다.

역사 갈등의 근원이 되는 것은 피해자 의식이다.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본 당사자와 그 유족들은 원초적 피해자 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사자의 피해자 의식이 해소되지 않고 후세로 상속될 때 역사 갈등은 장기화한다. 나아가 피해 당사자에 대한 공감도가 높아져 본인의 피해자 의식이 신념화하면 역사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피해자 의식은 식민지 경험의 유산

한편 피해 상속인임을 의식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 국민은 당사자의 피해자 의식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기 어렵다. 당사자의 상처와 고통을 부정하거나 그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국민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국민 정서다. 따라서 식민지 시대 친일파의 직접적 후예는 물론이고, 정부 수립 이후 일본과 관련하여 이익을 얻은 자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국민 정서의 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국민 정서에 기반을 둔 피해자 의식이 밖으로 향하여 해소되지 못할 때, 가해자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지고 갈등은 한층 심화한다. 한편 안으로 향하여 피해자의 상처에 공감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배제의 심리가 강해질 때, 그들을 비난하는 극단적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식민지 경험이 남겨 놓은 부정적 유산으로 피해자 의식에 기인하는 이러한 집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미래로 향하지 못한다.

국익론만으로는 과거사 화해 힘들어

지난 1월 12일 징용자 문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국익론에 기반해 한·미·일 삼각 협조체제를 구축하려는 윤석열 정부는 병존적 채무 인수라는 방안을 공론화했지만, 피해자 측은 피해자 상처와 아픔을 돌보지 않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발했다.

결국 공개 토론회는 파행했고, 이후 피해자 측은 장내·외 행사를 이어가며 반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앞으로 일본과 협상이 타결되어 병존적 채무 인수가 시행된다고 해도 일부 피해자는 끝까지 수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갈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공개 토론회를 거치면서 치유론을 동반하지 않은 국익론만으로는 역사 화해의 길이 멀고도 험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진정 독립을 이루었는가를 묻게 된다. 해방 이후 일찌감치 주권 국가로서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고,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여 경제적 독립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식민 지배가 남겨놓은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정한 독립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신적 독립은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정신적 독립이 결코 일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며 도달해야 하는 경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 높은 자존감을 갖는 동시에 상대를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심적 공간을 마련하고, 기존 세계관을 넘어서는 지적 용기가 요구된다.

대통령 산하 한일화해위원회 설치

1919년 엄혹한 상황에서도 조선 지성 33인은 감정에 사로잡혀 일본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관을 벗어나 인도주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대안 세계를 제시하며, 일본을 포용하는 지적 용기를 발휘했다. 찬란한 문화 지성의 등불 아래 그들이 먼저 일본을 향해 팔을 벌렸고, 그 결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끌어냈다.

역사 갈등을 심하게 겪은 유럽의 경우 기독교라는 종교적 신념이 피해자 의식을 극복하고 역사 화해를 이루는 굳건한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느 하나의 종교적 신념, 철학적 원리, 정치적 이념, 도덕적 정의로부터 역사 화해를 이끌어갈 길잡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33인의 지성이 독립선언서를 만들어냈던 지혜를 살려 이 시대의 문화 지성을 도출할 산실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대통령 혹은 총리 산하에 ‘한일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거기서 유구한 역사 공동체 대한민국에 온축되어온 문화 지성의 등불을 밝혀보기를 권한다.

3·1절이 104주년을 맞이한다. 우리 함께 포용론의 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보자. 그리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털어버리고 온 국민이 소리 높여 만세 삼창을 불러보자. “대한 정치 독립 만세~” “대한 경제 독립 만세~” “대한 정신 독립 만세~.”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