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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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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매년 2월 이즈음이면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올해도 망했구나,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체념과 환멸의 기분이다. 20여 년째 반복하는 것 같다. 그 과정이 뻔하고 유치해서 고백하기 창피한데, 그래도 적어본다.

1월 1일에 한 해 목표와 계획을 거창하게 세운다. 장편소설 초고를 마치겠다는 연간 목표도 있고, 매일 원고지 몇 매를 쓰겠다거나, 새벽 몇 시까지 일어나겠다거나, 술을 줄이겠다거나 하는 일일 목표도 있다. 그런 계획표를 짤 때에는 한편으로는 비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들뜬 상태다. 사도 바울로나 장발장처럼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신년 계획 무너지는 2월의 고민
과연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기부정에서 나온 향상심의 끝

그 다짐이 일주일에서 보름 사이에 한 번 어그러진다. 마음을 다잡는다. 며칠 뒤 엇나가는 하루가 또 생기고,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는다. 같은 일이 1월 말 2월 초에 몇 번 되풀이된다. 어느 날 마침내 의지력이 무너지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 빠진다. 자포자기해서 연초 계획과 반대로 행동한다. 글을 쓰지 않고, 늦잠을 자고, 대낮부터 맥주를 마신다. 며칠 뒤 정신을 차리면 2월 중순이다.

왜 같은 후회를 반복할까. 무엇이 문제일까. 일단 내가 회복 탄력성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다. 작심삼일도 운용하기 나름이다. 어떤 결심을 3일간 지키고 4일째 무너진 뒤 5일째 초심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3일짜리 결심을 90번 되풀이한다면 1년 365일 중 270일을 건질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올해는 글렀다’는 생각에 금세 사로잡히고, 그 바람에 너무 빨리 포기한다. 정작 결과물의 완성도에는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완벽주의, 어린아이 같은 결벽증 탓이다.

방법론에 대한 고민도 부족했다. 예를 들어 새벽에 일찍 일어난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그 생활 패턴을 유지하기 위해 학원이나 헬스장의 아침 수업을 찾아 등록할 수도 있을 테고, 결심을 지키는 과정을 소셜미디어에 공개하며 스스로를 압박할 수도 있겠다. 사소한 습관이나 주변 환경을 바꿔 ‘넛지’ 효과를 이용할 수도 있고, 유혹에 흔들릴 때 대비책을 마련해둘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결심만 굳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오로지 내 정신력만 믿었다. 그러다 보니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 당초 정했던 규칙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됐다.

처음부터 비현실적인 목표들을 너무 많이 세웠다는 반성도 한다. 인간의 의지력도 유한한 자원이라고 한다. 보충하지 않고 계속 퍼내 쓰다 보면 바닥이 보이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보유한 자원의 양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려 들지 않고 한순간에 드라마틱하게 변신하고 싶어 했다. 욕심이 많아서, 또 조급해서다. 체질 개선이라는 길고 지루한 과제를 직시하기 싫어한, 한탕주의의 소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실적인 목표일까. 이 질문의 답을 궁리하다 보면 음울하게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내가 세운 목표들이 혹시 내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도 바울로나 장발장의 경우도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바뀐 것이지, 식성이나 아침 기상 시각이 변한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그들은 변신 전에도 열정적인 캐릭터들 아니었던가. 매사에 열기가 모자란 내가 정신력만으로 ‘에너자이저’가 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신년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그런 자기 개선 의지를 품고 있다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내 경우 그런 향상심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부정에서 출발했던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장점을 키우는 게 아니라 단점을 지워버리려 했던 것 아닐까…. 내게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살펴보려 하지도 않은 채.

연초에 세운 목표를 엑셀로 정리했는데, 그 파일을 들여다보며 고심 중이다. 아무래도 목표의 개수를 줄여야겠다. 내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게 몸에 맞는 사람인지, 단순히 ‘아침형 인간’을 찬양하는 트렌드에 휩쓸린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따져봐야겠다. 일주일에 한두 번 신나게 맥주를 마시는 게 인생의 낙인데, 굳이 그 즐거움을 버려야 하는지도. 그러면 더 열렬하게 추구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인생 구조조정’이라 불러야 할 작업에 착수해야 할 때인가 보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