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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산으로 가는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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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필자 선우엔조 신경과의원 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신경과장

조필자 선우엔조 신경과의원 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신경과장

국립중앙의료원(NMC)은 6·25전쟁 이후 의료 재건을 목표로 세워져 1958년 지금 자리에서 320병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주도로 1956년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과 한국 정부는 ‘국립중앙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1968년 한국 정부에 운영권이 인수돼 한때 840병상까지 운영하며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춘 명실상부한 국가중심병원으로 역할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대형 민간 의료기관들이 줄지어 설립되면서 우수한 의료진이 빠져나가고 외국 원조로 지은 병원은 낡았다. 신축·이전이 논의됐지만, 기존 시설에 대한 정부 투자가 멈춘 상태로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2002년 사스(SARS) 유행, 2009년 신종플루 사태, 2014년 에볼라바이러스 감염 사태를 겪었다. 2015년 메르스(MERS) 위기를 계기로 국립중앙의료원이 ‘메르스 전담 중앙거점 의료기관’으로 지정되면서 기존 환자 진료를 모두 중단하고 메르스 환자를 위해 전 직원이 총력 대응했다. 2017년에 중앙감염병 병원으로 지정됐다.

기재부의 계획 축소 방침 부당
국가중심병원 역할 누가 맡나
감염병 전문병원 건립은 말뿐?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협의회 피켓시위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협의회 피켓시위

메르스 사태 때 다른 병원으로 보낸 기존 환자들의 상당수는 돌아오지 않았고 민간병원에 가기 어려운 취약계층 환자들이 다시 와서 조금씩 병원 가동률이 회복됐다. 그러던 중에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2020년 1월부터 지금까지 ‘코로나 대응 중앙감염병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메르스 사태로 텅 비었던 병상이 어느 정도 채워질 무렵 갑자기 닥친 코로나 환자들을 받기 위해 기존 환자들을 내보내야 했다.

지금은 일반 환자 진료를 재개했지만 다른 병원으로 떠난 환자들이 돌아오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도 의료진은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소명을 다 하기 위해 노력했다. 60년 이상 된 노후 시설, 민간 의료기관보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으로 국민이 기대하는 최상의 진료를 수행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며 신축·이전이 속히 실현되길 학수고대해왔다.

그러나 최근 기획재정부의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 축소 계획(모병원 526병상 포함 총 760병상) 소식이 알려지자 국립의료원 의료진이 철회를 외치고 있다. 모병원 800(총 1050) 병상이던 것을 기재부가 축소한 이유로 병상 이용률이 2016~2019년 4년 평균 약 70% 수준이란 점을 지적하자 의료진이 반발하고 있다. 민간병원으로 가기 어려운 취약계층 환자들까지 억지로 내보내며 메르스와 코로나에 대응하도록 일반 환자 진료를 위축시킨 정부가 당시 병상 이용률을 근거로 투자를 제한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감염병 위기가 또 오면 정부는 똑같은 명령을 국립중앙의료원에 할 것인가.

한국의 의료 기술과 접근성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한국 의료의 우수함은 민간 의료기관의 발전으로 이룬 것이다. 그 결과 메르스와 코로나 사태 당시 취약한 공공의료의 구멍을 뼈아프게 경험했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지지부진한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 논의가 2020년 재개됐다.

공공 영역의 필수 중증 의료를 이끌 국가중심병원이 필요하다. 감염병 재난이 발생하면 필수의료 및 의료 안전망 역할을 하고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수준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당초대로 모병원 800(총 1050) 병상이 필요하다.

마침 2021년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이 세계 최고의 중앙감염병 전문병원 건립에 써달라며 국립중앙의료원에 7000억원을 기부했다. 그런데 기재부가 축소한 규모로는 기대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 제대로 신축·이전 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국가중앙병원을 포기하고 7000억원을 삼성에 돌려줘 삼성의료원 등 민간 병원 중심으로 국가 감염병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낫겠다. 수준 낮은 국가 병원은 세금 부담만 키우고 취약 계층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참여한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 공동추진단은 2021년 세계 수준의 감염병 병원 건립, 모병원을 필수 중증 의료의 중앙센터와 지역 공공병원의 3차 병원으로 육성하겠다는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정부는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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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자 선우엔조 신경과의원 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신경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