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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진석 칼럼

‘온고지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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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

가르치는 사람의 모범으로 공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인격을 제시한다.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태도다. 우리의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말한다. 공자의 온고지신보다 연암의 법고창신이 조금 더 실천성을 드러내 보이기는 하나,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균형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과거를 따뜻하게 대하면서 미래를 연다고 하니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러길래 공자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온고지신의 교훈적 의미를 줄여서 보지 않는다.

어떤 좋은 말은 의미가 좋다는 것 자체로 권위를 갖는다. 그래서 그 ‘좋은 말’을 사용하기만 해도 진짜로 실천한 듯한 환각에 빠지곤 한다. 이런 환각에 쉽게 빠지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부지런해야 곰곰이 생각할 줄 알고, 곰곰이 생각해야 질문하게 되고, 질문해야 문제를 파고들고, 문제를 파고들어야 참 실천력이 발동한다.

‘온고’의 균형 매달리면 변화 불가
꽉 찬 지식의 그릇 깨야 ‘지신’ 가능
반도체 정책 등 ‘창의적 균열’ 미흡
과거 살리느라 미래를 포기해서야

온고지신에서 ‘온고’는 과거를, ‘지신’은 미래를 향한다. 대답은 과거를 다루고, 질문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궁금해하는 일이므로 미래적이다. 대답에 익숙한 사람은 과거 쪽으로 더 기울고, 질문하는 힘이 있어야 비로소 미래 쪽으로 기울 수 있다. 대답에 익숙해 있으면 ‘온고’를 더 잘하거나 ‘온고’에만 빠진다. 질문을 할 힘이 있어야 ‘지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질문하는 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라면, 입으로는 ‘온고지신’이라고 ‘온고’와 ‘지신’을 붙여서 말하지만, 실지로는 ‘지신’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평생 ‘온고’만 하다 가기 쉽다. 이 세상 어떤 일도 능력이 있어야 하게 되고, 능력이 없으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온고지신’도 행하는 사람이 쌓은 내공에 따라 ‘온고’에 멈출 수도 있고, ‘지신’까지 갈 수도 있다.

‘지신’은 창의나 탐험에 가까우므로 ‘지신’을 하려면 ‘온고’를 할 때와는 다르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지신’에는 필연적으로 이미 있는 상태의 연속성이나 균형에 균열을 내는 파괴적이고 거친 동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안정된 기존의 상태에 균열을 내는 이 거친 동작이 어느 정도로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가가 ‘온고’에 머무는 사회인지, ‘지신’까지 할 수 있는 사회인지를 결정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구도에서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를 구별하는데, ‘차가운 사회’는 균열을 내는 파괴적 동작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온고’에 머물기 쉽다. 반면에 ‘뜨거운 사회’는 균형이나 연속성에 부단히 균열을 내는 일이 구조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온고’에 머물지 않고 부단히 ‘지신’이 일어난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도 서양을 ‘뜨거운 사회’로, 동양을 ‘차가운 사회’로 배치했을 터인데, 우리는 분명히 ‘차가운 사회’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지신’이 고품격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지식의 생산이다. 지식은 삶을 펼치는 가장 수준 높은 무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직 아니다. 지식 수입국으로서 이 정도의 발전은 기적이다. 다른 지식 수입국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을 우리는 해냈다. 우리는 다른 지식 수입국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지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지식 수입국으로 살면서 만든 우리의 그릇이 이미 꽉 찼다는 데에 있다. 이제는 이 그릇을 키워야 한다. ‘온고’ 쪽에 머물던 몸을 세워서 ‘지신’ 쪽으로 기울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미 있는 그릇의 연속성과 균형에 균열을 가하는 ‘지신’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용기를 내야 하는 이유는 긴 세월 대답에만 빠져 사느라 우리의 영혼이 과거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사회 변화에 맞는 틀을 새롭게 짜지 못하고 해방 후부터 이어진 해묵은 갈등의 틀을 77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면서 과거를 헤집는 ‘온고’의 기풍으로만 시간을 보내고 있다. 타다를 금지한 일이나 초기 기술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드론 시장에서 약화한 것도 모두 기존의 연속성과 균형에 균열을 내지 못하는 ‘온고’의 점잖음으로 미래의 일에 과거의 규제를 적용한 결과다. 과거를 살리느라 미래를 포기한 일이 이미 적지 않다.

나라나 기업이나 그릇 크기의 한계에 도달하면 대개는 도전(‘지신’)보다도 관리(‘온고’)의 유혹에 빠진다. 그러면 ‘지신’을 맡은 기획이나 전략 부문을 밀치고, ‘온고’를 맡은 재무 부문을 앞세우게 된다. 물론 입으로는 두 개를 붙여서 ‘온고지신’을 말한다. 기획재정부도 이름에는 ‘지신’하는 ‘기획’과 ‘온고’하는 ‘재정’이 합쳐져 있지만, 실제로는 ‘온고’를 할 수 있는 능력밖에 안 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반도체 투자 대기업 세액공제도 야당 안의 10%보다 낮은 8%로 정한 것이다. 균형만 알고 창의적 균열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도 한가하게 ‘온고지신’? 긴장하지 않다가는 질주하는 문명의 트랙에서 튕겨 나갈 것이다. 지금은 차라리 ‘단고지신’(斷故知新)도 부족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새말새몸짓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