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되살아난 김복진의 ‘소년’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주먹을 쥔 채 꾹 다문 입술로 앞을 응시하는 소년이 있다. 군살 없는 상체와 탄탄한 허벅지를 지나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 이 입상은 ‘최초의 근대 조각가’이자 사실주의 미학의 선구자 김복진(1901~1940)의 ‘소년’(1940)이다. 작가의 인체표현 기법의 정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도판으로만 전해져 왔으나, 최근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과 젊은 조각가들의 열정, 국립현대미술관의 협력에 힘입어 석고상으로 복원되었다. ‘김복진과 한국 근현대조각가들(청주시립미술관, 29일까지)’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는 김복진을 중심으로 18인의 작품 50여 점을 함께 선보이면서 사실적 인체 조각의 계보를 근현대 조각사 가운데 자리매김한다.

원작의 외형을 알려주는 단서는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에 실린 고화질의 흑백 도판이 유일하다. 복원의 전 과정을 주관한 이병호(47), 장준호(43) 두 조각가는 도판을 고해상도로 스캔한 다음, 모델의 나이를 2차 성징이 지난 고교생으로 추정했다. 당시 ‘소년’의 모델이 손기정 선수였다는 ‘설’이 나돌 만큼 단단한 근육질이었던 점을 감안해, 도판과 유사한 체형의 국가대표 체조선수(키 170㎝)를 모델로 섭외했다. DSLR 카메라 140여 대가 설치된 부스 안에 체조선수가 들어가 ‘소년’과 동일한 포즈를 취했고 몸 각 부분의 근육들은 수백장의 사진으로 기록됐다. 이렇게 얻어진 2D 데이터는 프로그램(Reality Capture)을 통해 가상 컴퓨터 공간에서 3D로 전환함으로써, 도판만으로는 확인이 어려웠던 측면과 후면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남은 근대조각 수작
첨단기술 활용 80여년 만에 재현
원작과 구분되는 새로운 분위기
이 시대에 돌아본 작가의 예술혼

이병호·장준호, 김복진 조각 프로젝트, 소년, 2022, 석고, 120x36x3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병호·장준호, 김복진 조각 프로젝트, 소년, 2022, 석고, 120x36x3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기계와 컴퓨터가 추출한 데이터보다 중요한 것은 세부에 대한 마무리였다. 두 복원작가는 원작에 도달하고자 가능한 한 자신의 주관을 배제했다. 원작자의 제작 방식을 담은 기사와 구술자료, 『힘의 미학』(최열), 『김복진 연구』 (윤범모) 등 후대의 연구서를 분석하여 당시의 제작 방법과 태도에 접근했다. ‘소년’이 등신대가 아닌 ‘4척’의 크기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조각상은 최종적으로 120㎝로 축소 제작되었으며, 총 3개월여 동안 원형에 가까운 작품을 얻어 내기 위해 4차례나 상을 재제작했다.

김복진은 조각가이기에 앞서 운동가이자 이론가였다. 동경미술대 유학 시절부터 ‘토월회’ ‘파스큘라’ 등 사회주의 문예 단체를 조직하고 이끌던 그는 1923년에는 민중미술론의 효시라 할 ‘상공업과 예술의 융화점’을 발표했으며, 1925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카프)’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정치와 예술 양 방면에서 역량을 펼쳤으나 1928년 일제에 체포되어 1934년까지 5년 6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당시 카프는 산하에 미술부를 두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김복진은 카프에 복귀하지 않고 창작과 교육에 몰두했다. 기록으로 전하는 김복진의 생전 작품 50여 점 중 41점이 출옥 후 6년 동안 제작됐으며, 박승구·이국전·윤효중 등 차세대를 이끌어 갈 걸출한 조각가들을 길러낸 것도 이 시기였다.

‘소년’을 조각한 1940년은 어린 딸의 죽음이 준 충격과 과로로 인해 김복진이 갑작스레 죽음으로 맞이한 해이기도 했다. 그는 서양의 모방과 일본의 아류에서 벗어나 조선의 전통에 기반한 민족적 조각을 추구했다. 김복진은 “인생에 적극적으로 동세(를 끌어들이고),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정력과 박력을 갖은 예술혼”을 추구했으니, 이러한 예술적 의도가 ‘소년’을 통해 구현된 것이다.

80여 년이 지난 오늘 ‘소년’은 새롭게 탄생했다. 원작의 박력이나 긴장감과 구별되는 새 ‘소년’상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은 흑백 도판이 주는 신비감에 젖어있던 관람자에게는 낯선 결과물일지 모른다. 원작을 탐구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생겨났을 이 ‘틈’은 그러나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관람자가 떠안아야 할 몫일 것이다.

“사람은 역사 속에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김복진, 모든 지적 체계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유전과 사회적 결과에 의한 것’이라 믿었던 역사주의자 김복진은 새 소년상이 드러내는 낙관적 역사관에 공감하고 기뻐할까. 낙관보다 비관적 전망이 우세한 새해 아침에 시대를 앞서간 그의 예술혼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주현 미술사학자·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