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차이나 김두식의 이코노믹스

미·중 반도체 전쟁, 우리 안보 이익부터 챙겨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미·중 사이 한국의 국가전략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국제통상법센터장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국제통상법센터장

지난 10월 미국이 중국에 대한 고성능 컴퓨팅 칩과 장비 수출을 금지하자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두 나라 사이에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썼다. 그는 1999년에 발간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냉전체제를 대체하는 국제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세계화로 인해 세상에서는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그러나 그의 예견과 달리 세계화는 전쟁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화로 형성된 상호의존성이 무기로 사용되는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2020년 화웨이 수출금지, 전쟁의 서막

미·중 간 반도체 전쟁은 2020년 5월 미국이 중국 통신기업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금지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올해 10월의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는 일개 기업이 아닌 중국 전체를 겨냥한 조치다. 고성능 컴퓨팅 칩과 소프트웨어, 제조 장비, 부품의 중국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미국인이 중국 내에서 반도체의 제조나 개발에 관여하는 것도 허가를 받도록 했다. 한국 등의 외국 업체도 미국 기술을 사용한 첨단 반도체 칩과 장비를 허가 없이 중국에 수출할 수 없도록 했다.

미, 대중 컴퓨팅 칩·장비 수출금지
갈수록 높아지는 ‘총성 없는 전쟁’

한국·대만 등 우방국과 연대 추진
국제 통상규범과의 마찰 불가피

한국은 어디까지 참여해야 하나
안보 직결된 기술·물품에 한정을

이번 미국의 조치는 중국과의 기술패권경쟁이 중국에 대한 첨단기술 봉쇄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첨단기술과 기계장비 수출을 전면 금지했던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실제로 미국은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수출규제 직후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이제 ‘포스트 냉전’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 ‘결정적 10년’(a decisive decade)이 시작됐다고 했다.

미국의 기술봉쇄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다. 중국은 이미 인공지능과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상당한 기술 수준에 도달했고, 제3국 우회 등을 통해 기술봉쇄를 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첨단기술 생태계에서 중국을 배제할 수 있는 목줄을 쥐고 있다. 예컨대 반도체 분야에서는 고성능 반도체 생산을 위해 꼭 필요한 전자 설계 자동화 기술(EDA)과 일부 첨단 제조 장비를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 중국은 이런 기술과 장비를 획득하지 못하면 첨단 칩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어렵다.

11월 초 한·미간 수출통제 조율 시작

이코노믹스

이코노믹스

미국이 추구하는 또 하나의 봉쇄전략은 우방국들과의 연대다. 오늘날 첨단 기술제품 개발 및 제조능력이 여러 국가에 분산된 상황에서 미국 혼자 완벽한 기술봉쇄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도체의 경우만 해도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는 한국·대만 등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제조 장비의 상당 부분도 미국 밖에서 공급된다. 이에 미국은 한국 등 우방국들에 미국이 취한 것과 유사한 수출통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미 지난달 9일 한국과 미국 간에 수출통제를 조율하기 위한 작업반이 설치되어 가동을 시작했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봉쇄를 위한 국제연대에 한국이 어느 정도로 참여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은 2020년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해 국제무역의 기본원칙을 무시하고 시장원칙과 공정경쟁을 해치는 것이며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며 강력히 반발한 바 있다. 한국이 미국의 첨단기술 수출통제에 참여하는 경우 중국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미국 쪽을 선택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대중국 첨단기술 수출통제에 참여해야 할 것인가. 참여한다면 어떤 조건과 내용으로 참여할 것인가.

2차대전 직후 COCOM이 기원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원래 수출통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 속에서 탄생한 제도다. 서구진영 국가들이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를 결성하여 동구권 국가들에 무기 수출을 금지한 데서 시작됐다. 냉전 종료 후에도 민족과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전과 테러가 빈번히 발생하면서 바세나르 체제 등 4대 수출통제체제가 결성되어 무기나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소위 이중용도 물자나 기술의 수출입을 통제해 왔다. 우리나라도 4대 수출통제체제에 가입하여 전략물자의 수출입을 통제 관리하고 있다.

미국은 수출통제체제의 주도국으로서 군사기술과 이중용도 기술의 수출을 차단하기 위하여, 혹은 인권 탄압과 테러리즘 억제라는 미국의 대외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출통제를 사용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이 미국의 지정학적 경쟁자로 부상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출통제가 확대 사용되고 있다. 2018년 미국의 수출통제개혁법에서 상무부에 대해 신기술과 기반기술(emerging and foundational technologies)의 수출을 통제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도 그런 흐름을 보여준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러나 수출통제가 미국과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수단으로 확대 사용되는 경우 국제통상규범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수출통제는 특정 제품의 수출과 기술 이전을 일방적으로 제한하는 조치로서 무역자유화 규범과 충돌한다. 국제규범상으로 수출통제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에서 말하는 ‘필수적인 안보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 혹은 국제평화와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연합(UN) 헌장 상의 의무이행을 위한 조치로 정당화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현재의 미·중 간 전략적 경쟁 상황에서 유엔 협약상의 의무를 들어 수출통제를 정당화하긴 어렵다. 가능성이 있다면 수출통제가 안보 조치라는 논리일 것이다. 실제 미국은 중국에서는 반도체나 인공지능 같은 첨단기술이 군사적 용도나 민간인 감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첨단기술 수출통제는 미국의 안보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미국의 무역 규범, 중국 견제에 실패

하지만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 중국을 보는 시각은 국가마다 다르다. 예컨대 중국과 긴밀한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국과의 경제관계가 미·중 패권경쟁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자국의 안보적 이익에 부합한다고 볼 수도 있다. 미국이 말하는 안보 논리로 한국 등 제3국들의 수출통제 참여를 정당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미국 무역대표 캐서린 타이는 지난 10월 루스벨트 연구소에서 한 연설에서 기존 무역규범이 중국의 국가 주도 산업정책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그것이 최근 미국이 ‘진보적’ 산업정책을 펴온 이유라고 주장했다. 미국 주장대로, 중국의 국가 주도 산업정책과 이를 통한 세계 경제패권 추구가 시장경제를 토대로 하는 다자주의 규범의 근본 취지에 반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적어도 민주주의 진영 국가 간에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정책이 국제규범에 반한다 하여 미국의 우방들이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에 참여할 명분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한국이 첨단기술에 대한 대중국 수출통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의 안보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나름의 명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우리 기업이 가진 기술과 물품이 중국에 수출되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구체적 근거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민간 파트너십 필요

더욱이 오늘날 대부분의 민간 기술이 군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중용도 기술에 대한 수출통제는 신중히 해야 한다. 따라서 수출통제의 대상도 안보이익 보호와 직결되는 기술과 물품에 한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출통제는 기업의 이익과 충돌된다는 점에서 수출통제의 대상과 조건, 내용을 정하는 과정에 민간 기업의 참여가 필요하다. 수출통제 규범에 기업의 관점과 이해가 반영될 수 있도록 일종의 정부-민간 파트너십을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간 기업들이 수출통제의 내용과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면 수출통제의 실효성도 높아지게 된다.

다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것과 같은 전시 또는 준(準) 전시 상황이 발생하면 이와 같은 수출통제에 대한 신중한 접근 방식은 포기될 수 있다. 우리의 안보나 국제평화를 직접 해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경제제재의 하나로 수출통제가 적용될 수 있고, 이 경우 수출통제의 범위는 크게 확대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미국·EU 등 서방의 경제제재와 수출통제가 그런 예다. 그러나 평시에는 정치 안보적 이유로 경제가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부합한다고 본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국제통상법센터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