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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현장 엔지니어 없인 ‘과학 한국’ 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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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과학과 기술, 혁신의 두 날개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최근 한 바이오벤처기업을 방문했다. 약물전달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과학적 원리를 대학이 개발했고, 그 원천 특허를 라이선스 받아 대박을 꿈꾸는 곳이었다. 그런데 과학적 원리를 현실화할 기술을 개발하느라 지금까지 무려 7년간이나 분투하고 있었다. 해당 벤처기업 대표는 “출구가 끊임없이 멀어지는 터널을 헤매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과학자의 시간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기술자의 시간이 한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흔히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과학은 돈으로 지식을 얻고, 기술은 그 지식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돈이 지식으로, 지식이 다시 돈으로 연결되는 순환고리에서 과학과 기술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잘못 받아들이면 과학이 앞서가면서 이론을 만들어내고, 기술이 뒤따라가면서 그 이론을 바탕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듯한 선형적 관계를 상상하기 쉽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과학이 먼저, 기술은 나중’의 오류
산업 ‘스케일업’은 현장서 일어나

증기기관 이후 열역학이론 탄생
기술자 출신 노벨상 수상자 많아

일본 조선업 쇠퇴는 현장 경시 탓
미국도 기술자 육성·지원에 방점

수많은 시행착오 필요한 기술발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 항공기엔진 제작현장. 스마트 팩토리 신공장은 정밀도가 높은 엔진부품을 3차원 검사기를 이용해 정확하게 치수 측정을 한다. [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창원사업장 항공기엔진 제작현장. 스마트 팩토리 신공장은 정밀도가 높은 엔진부품을 3차원 검사기를 이용해 정확하게 치수 측정을 한다. [사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과학적 이론 그대로 유용한 기술이 완성되는 경우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과학이론은 예외 없이 여러 변수의 영향을 고도로 통제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다. 더 추상적이고 단순화해서 표현하는 이론일수록 일반성이 더 높은 훌륭한 이론이 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포탄이 날아가는 것, 달이 뜨고 지는 것은 모두 다른 현실의 관찰이지만, 개별적 특성을 제거하고 나면 만유인력의 법칙 한 줄로 모든 운동의 핵심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과학이론이 더 보편적일수록 개별 현실과의 관계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옳다는 말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타당하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것이다. 현실에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려면 과학이론을 얻기 위해 무시했던 변수들을 다시 다 고려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가 생기고, 현실적 제약 때문에 대안을 찾는 지루한 과정을 버텨야 한다. 이것을 스케일업 과정이라고 하는데,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전형적인 기술의 영역이다.

과학이 기술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많다. 열역학 이론은 기술자들이 증기기관이 만들고 난 후 한참 뒤에야 발견된 것이다. 망원경을 만든 기술자들의 축적된 노력이 없었다면,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지 못했을 것이고,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도 한참 늦게야 등장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첨단 현미경을 구입하면 논문 발표업적이 크게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연구자의 노력만이 아니라, 현미경을 만든 기술자들의 기여도 절반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노벨과학상에서도 과학자와 기술자가 공동 수상하는 경우가 많다. 2002년 노벨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나 2019년 리튬이온 전지개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요시노 아키라도 회사에서 평생 근무한 엔지니어였다.

기술 선진국이 과학논문 선진국

기술선진국의 실험실에서 우수한 연구가 나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실험장비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술자, 즉 테크니션의 대우가 높고 수준이 높은 것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수준이 높으니 연구자가 도전적인 질문을 마음 놓고 던져볼 수 있고, 때때로 이 기술자들이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제안하는 경우도 많다. 과학적 원리가 기술발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이다.

몇 년 전 국제학회에서 재미있는 발표가 있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들이 기업과 공동으로 논문을 제출할 때 대학과 기업 간의 물리적 거리가 얼마인지를 조사한 연구였다. 브라질의 대표 대학들 사례가 등장했는데, 이들은 공통으로 5000㎞ 이상, 심지어 1만㎞ 이상 떨어진 기업들과 연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잘 분석해보면, 브라질의 대학과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이 협력한 결과였다.

브라질의 탁월한 과학자들도 실험실 수준에서 국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해줄 기술의 현장이 주변에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진국 기업들과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한 브라질 정부의 투자 혜택이 그 지식을 스케일업 하는 선진국 기업들에 돌아가고 있었다.

이 연구의 발표자는 중진국들이 과학에 투자하면 자연스럽게 국가가 발전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있다고 경고했다. 과학에 투자해서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기 때문에 과학에 투자할 수 있다는 인과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연구실의 과학’과 ‘현장의 기술’이라는 두 날개가 함께 있어야 혁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 리쇼어링 정책의 목표

기술 현장이 취약해지면 과학발전 속도 또한 떨어질 것이란 우려는 지금 미국이 제조업 리쇼어링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제조업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기술현장이 사라졌고, 그 결과 미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과학적 성취가 중국의 산업현장에서 스케일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미국은 과학적 발견에 집중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값싸게 생산하도록 역할 분담을 하자는 논리에 결정적 허점이 있었다.

중국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기술적 난관을 풀어내는 동안 새로운 과학적 발견의 아이디어가 생겼고, 그 결과 중국의 과학과 기술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빠르게 발전하는 효과를 간과했다. 최근의 미국 리쇼어링 정책은 이 정책적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수출규제를 통해 중국의 현장기술 수준을 제어하면서 중국의 혁신속도를 늦추고, 동시에 미국 내 첨단 제조현장을 복원하면서 미국의 혁신속도를 높이는 것이 목표다. 미국 내 일자리가 생기는 것은 덤이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연구실에서 노벨상을 꿈꾸는 훌륭한 과학자들만큼이나 기술현장을 지키는 탁월한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한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일본의 조선업이 한국에 밀려 존재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장 기술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젊은 엔지니어 사라진 일본 조선업

최근 일본 조선 산업단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젊은 엔지니어는 찾아볼 수 없고, 나이든 고령의 기술자들만이 어슬렁거리는 현장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기술자들이 고령화하는 만큼 신기술 도입 속도도 늦고, 현장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관련 분야의 과학기술 속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연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1970년대 산업 현장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발전을 시작했고, 연구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다. 그 이후로 과학과 기술, 이론과 현장이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가속적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이제 국제논문 발표 건수로 세계 10위, 국제특허수로 세계 4위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세계 4~5위 수준의 제조현장을 가지게 되었다.

최근 국제적 기술주권 경쟁의 와중에 혁신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고급 석박사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국가적 지원정책들이 하루가 멀다고 발표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산업현장을 지킬 기술자들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의 정책 지향이 참조할 만하다. 지난 10월 7일 미국 백악관이 발표한 범정부 차원의 첨단제조 국가전략에서는 첨단과학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장 엔지니어를 육성·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기술자 우대하는 분위기 만들어야

한국의 제조역량이 세계적이라고 하지만, 결코 손놓고 있을 상태가 아니다. 현장 기술자들은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고, 젊은 우수인재들이 현장을 외면한 지 제법 되었다. 기술현장의 상당 부분이 중소기업이라 보상 수준은 여전히 낮은데, 기술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존경과는 거리가 멀다. 역량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교육이나 재교육 지원은 양적·질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훈련기회를 국가가 지원한다고 해도 회사에서 교육시간 자체를 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본 조선산업의 몰락은 남의 일이 아니다. 석박사급 인재를 키워내는 국가적 노력 못지않게 현장 기술자를 지원하는 데도 국가적 관심과 투자가 절실하다. 노벨상급의 과학자가 많다고 해서 기술선진국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의 기술자들이 제대로 보상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진정한 기술선진국이다.

며칠 전 부산 지역에 위치한 한 중견 조선기자재 업체를 방문했을 때 그 회사 대표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그는 “현장 기술자들의 역량 향상을 위해 대학과 대학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도 교육 후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남아있도록 요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교육받고 다른 회사로 가더라도 결국 한국산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니 다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기업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