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려야 할 「배타적 사회」/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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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는 2명의 가장이 늦은 밤 옥상에서 맞닥뜨렸다. 공사장 인부에게 줄 돈 4백여 만원을 주머니에 넣고 귀가하던 옥상 집 가장과 옥상의 가스통을 점검하러 올라온 1층집 가장은 서로 상대방을 도둑으로 오인했다.
치고 박는 심야의 사투 끝에 두 사람은 함께 옥상에서 떨어져 한 가장은 목숨을 잃었고 다른 가장은 중상을 입었다.
1년여를 한지붕 밑에 살면서도 서로가 이웃의 얼굴을 모른다. 한마디 대화가 건네지지 않는다. 내 가족 내 새끼를 향한 극단적 가족이기주의가 창밖의 타인에겐 적대감으로 나타날 뿐이다.
막힌 대화와 배타적 가족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두 가장 옥상 사투사건은 어쩌다가 일어난 유별난 일이 아니다. 형태를 달리했을 뿐 우리 주변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우리 삶의 현실을 말해주는 단적인 한 예에 불과하다.
한지붕 밑에 3개의 정파가 모여 살기로 작정한 3당통합 선언이 나온 지도 1년이 되어간다. 구국과 민주화를 합당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계파간의 막힌 대화와 폐쇄적 이기주의에 묶여 집안싸움에만 골몰하고 있다.
「다세대 정당」 민자당이 출범해서 지금까지 보여온 계파간의 투쟁과 내각제를 둘러싼 내분의 진통은 다세대주택 옥상 위에서 벌어졌던 두 가장의 사투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우리 시대 정치의 수준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적 공론에 부쳐져 정당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국민적 합의를 마련해야 했을 정치체제를 밀실 속에 몇 사람이 모여 각자의 이해에 따라 각서를 쓰고 내각제 추진을 약속했다. 그 각서가 들통나자 계파간의 이해는 더욱 첨예화되었고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계파의 가장들이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분가는 가까스로 막았다지만 암투는 앞으로 더욱 내연화할 터이고 언제 또다시 옥상에서 한판 사투를 벌이게 될지 정치판을 지켜보는 국민의 가슴은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막힌 대화와 가족이기주의가 두 사람의 가장을 옥상 사투로 몰았다면,대화와 여론을 무시한 채 계파이기주의에 광분하는 정치인들은 오늘의 정치를 분열과 내분의 소용돌이로 몰아가고 있다.
두 가정의 책임을 진 두 가장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중상을 입었다면,정치제도로서 이 나라 정치의 새로운 변혁시도로 해볼 만한 제도라고 여겨졌던 내각제는 정파간의 싸움질로 폐기처분되었고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다.
대화와 여론을 무시한 정부의 권위주의적 밀실행정에 대해 『내집 뒤뜰에 웬 핵폐기물이냐』는 주민들의 집단이기주의가 맞서 폭동의 상황으로까지 번진 안면도사태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주민들의 의사를 애당초 묵살한 채 비밀리에 추진하려 했던 그 비밀주의가 주민들의 원성을 증폭시킨 것이다.
정부에 잘못이 있다면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게 시민의 저항권이다. 그렇다 해서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을 납치해 뭇사람들 앞에 발가벗겨 사형을 가하고 공공건물과 기물을 점거ㆍ방화하는 폭력시위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조처가 내려질 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폭력으로 맞선다면 이 사회는 끝없는 집단이기주의의 피비린내나는 각축장으로 바꾸어질 것이다.
가정마다 켜켜이 높은 벽을 쌓아가는 배타적 가족이기주의,대권을 앞에 두고 정당과 계파간에 지칠 줄 모르는 암투를 벌이고 있는 계파이기주의,공장에서 거리에서 마을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집단이기주의의 횡포를 지켜보면서,과연 우리에겐 아직도 민주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바란 민주화란 무엇이었던가. 폭압과 권위주의 지배를 거부하고 대화와 자율,법과 질서에 따른 과정과 절차에 의해 도출된 국민적 합의 결과를 존중하고 추진하는 시민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민주사회가 아니었던가.
극한대결로 치달았던 산업현장과 대학가의 소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지금,그만큼 큰 희생을 치렀다면 이젠 뭔가 민주화의 틀을 다져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참으로 허망한 낙관론으로 끝나가고 있지 않는가.
가정과 사회와 정치에서 대화와 자율은 막히고 포기되고 있으며 법과 질서에 따른 과정과 절차는 무시되고 짓밟히면서 국민적 합의는 극단적 이기주의로 갈기갈기 찢겨나기만 할 뿐이다.
때로는 6공화국의 결단력없는 지도력 탓이라고 비난하고 때로는 3김이 민주화의 걸림돌이라고 지탄한다.
앞의 비난 속에는 권위주의와 타율적 지배를 향한 강한 향수가 담겨 있을 수 있고 뒤의 지탄 속에는 3김만이 퇴진만 하면 민주화가 저절로 이뤄질 수 있다는 허망한 낙관론이 깔려 있다.
이 사회 구석구석에 계층마다 지역마다 형태를 달리한 배타적 집단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는 한,3김을 대신한 3장4이가 나온다 한들 민주화의 가능성은 밝아질 수가 없고 권위주의를 향한 향수만이 더욱 확산되어 다시금 어두웠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참담한 비관론에 빠지게 된다.
이 참담한 비관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선 가정과 사회,정부와 정당이 대화의 통로를 열어야 하고 폐쇄적 비밀주의를 걷어내야 한다.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리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적 집단이기주의는 사라져야 하고 정파간의 계파이기주의도 이젠 막을 내려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민주사회를 거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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