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부터 정육·구급약·중고차까지 자판기서 뽑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7.23 00:01

업데이트 2022.07.2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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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14면

스마트 자판기 열풍 

서울 강남의 GS25 DX랩 안에 설치된 주류 자판기. 지문 인식으로 성인 인증을 한 다음 화면 터치로 결제할 수 있다. [뉴스1]

서울 강남의 GS25 DX랩 안에 설치된 주류 자판기. 지문 인식으로 성인 인증을 한 다음 화면 터치로 결제할 수 있다. [뉴스1]

지난 20일 오후 서울 역삼동 직장가의 GS25 DX랩(디지털 경험 연구소) 편의점은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한 직장인이 와인 진열대 옆에 설치된 자동판매기 앞에 서서 관심 가는 와인을 만지자 자판기 상단 모니터에 설명 문구가 나왔다. 생산국과 와이너리(양조장)가 어디인지, 알코올 도수와 당도는 몇인지, 어울리는 안주는 뭔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소개됐다. 교육을 받은 점원도 일일이 기억하기 쉽지 않을 정보를 자판기가 술술 쏟아내는 것이다. 다른 한쪽엔 맥주·소주 등 기타 주류 자판기도 있었다. 이 자판기의 모니터를 터치해서 원하는 술을 고른 다음 신용카드와 지문 인식으로 성인 인증을 하면 구입할 수 있다.

이곳은 GS25 브랜드로 편의점 사업을 하는 GS리테일이 지난달 말 시범적으로 선보인 미래형 편의점이다. 심야엔 무인 매장으로 전환, 점원 없이도 와인 등 주류를 판매해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직장인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24시간 운영되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기반의 스마트 자판기가 이를 가능케 한다. GS리테일 관계자는 “무인 편의점은 (성인 인증이 필요한) 주류를 판매하지 못하는 게 한계였는데 지문을 인식하는 자판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했다. 회사 측은 이 매장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향후 담배 자판기까지 도입, 전국적으로 무인 편의점 수를 늘린다는 계획이다.

국내 자판기 시장의 10% 2만대 보급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글로벌 언택트(untact·비대면) 열풍이 2년여 지난 지금 산업계의 스마트 자판기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캔·페트 음료 자판기는 이제 구식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이런 것까지 자판기로 구입할 수 있느냐’는 반응이 나올 만큼 자판기의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팬데믹 이후 비대면 수요가 급증하면서 자판기의 필요성이 커지자 기업들이 관련 신기술 도입에 몰두하고, 정부도 규제를 완화한 덕분이다. 와인 등 주류뿐만 아니라 신선식품인 정육과 밀키트(meal kit·손질된 식재료와 양념을 포함한 조리 직전 단계의 식자재 세트), 화장품, 심지어 의약품이나 자동차까지 자판기로 구입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롯데지주 산하 편의점 브랜드 미니스톱은 신선식품 플랫폼 기업 프레시스토어와 손잡고 정육 자판기를 도입해 일부 매장에서 운영 중이다. 돼지고기·소고기 등의 다양한 부위를 냉장·냉동 형태로 포장해 자판기 안에 넣어 소비자가 한우 등심이나 돼지 삼겹살 등을 취향에 맞게 골라 구입할 수 있다. 편의점의 주요 고객층인 1인 가구나 2인 가구를 겨냥해 소(小)포장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정육 자판기를 애용한다는 정성진(33)씨는 “밤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출출해서 고기 생각이 날 때가 있다”며 “정육점이나 식당은 문을 닫은 때라 자판기가 있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고기를 사와 집에서 구워먹는다”고 말했다.

기존 자판기가 스마트 자판기로 진화하면서 저장·보관 기술도 발전, 가공식품뿐 아니라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을 이렇게 팔 수 있게 됐다. 스마트 자판기 안엔 온도 감지기(센서)가 탑재돼 자판기 스스로 적정 내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 스마트 자판기는 운영 업주가 원격(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재고 관리와 고장 여부 파악 등을 할 수 있어 업주 입장에서도 그만큼 편리하다. 가정간편식 전문 기업 프레시고는 이런 편의성을 갖춘, 밀키트를 취급하는 스마트 자판기를 2년여 연구 끝에 자체 개발해 지난해 운영 점포(프레시고24) 수를 전국적으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이진구 프레시고 대표는 “소비자가 집에서 냉장고 문을 열 듯 식품을 쉽게 꺼내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게 스마트 자판기”라며 “기존 자판기와 달리 상품 입고 요청 및 결산 작업까지 온라인 시스템을 통해 자동 처리할 수 있어 업주들도 쉽게 운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니스톱은 프레시스토어와 손잡고 다양한 부위를 선택할 수 있는 정육 자판기를 도입해 일부 매장에서 운영 중이다. [사진 각 사]

미니스톱은 프레시스토어와 손잡고 다양한 부위를 선택할 수 있는 정육 자판기를 도입해 일부 매장에서 운영 중이다. [사진 각 사]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도 스마트 자판기 운영에 적극적이다. ‘에뛰드’ 브랜드 화장품을 일부 KTX 기차역과 지하철역 내 자판기에서 판매하고 있다. 화장품도 식품처럼 유통기한 관리가 중요한 분야인데, 품질 저하 방지를 위해 내부 온도를 일정 수준으로 관리할 수 있는 스마트 자판기가 과거 화장품 업계의 선봉장 역할을 하던 로드 숍(road shop·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소규모로 연 가게)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에 힘입어 지난해 약 20만 대 규모로 형성된 국내 자판기 시장의 10%는 스마트 자판기(약 2만 대)가 차지한 것으로 한국자동판매기공업협회는 추정하고 있다.

쓰리알코리아가 만든 화상투약기. [사진 각 사]

쓰리알코리아가 만든 화상투약기. [사진 각 사]

스마트 자판기의 취급 영역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당장 약사 출신 박인술 대표가 이끄는 스타트업 쓰리알코리아가 만든 화상투약기(소비자가 약사와 화상 상담해 의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 스마트 자판기)가 지난달 정부의 규제 특례 승인으로 시중에 유통될 수 있게 됐다. 현행법상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약사의 의약품 판매는 금지되지만 이 자판기가 도입되면 심야 시간대나 공휴일 등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에도 의약품을 사거나 팔 수 있게 된다. 다만 전문의약품이 아닌 해열·진통소염제 등 11개 품목의 일반의약품만 대상이다. 정부는 서울 지역 약국 10곳에서 3개월간 화상투약기를 시범 운영한 후 확대 도입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자판기와 무관할 것 같은 자동차 분야에서도 관련성이 커지고 있다. 중고차 검수·판매를 하는 스타트업 체카는 자판기 개념을 앞세운 거래 플랫폼 출시를 앞두고 있다. 차량 진단 전문가가 174가지로 정밀 검수한 중고차를 소비자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으로 구입할 수 있는데, 차량 인도 때 현장에서 간편하게 자판기 QR코드 인증만 거치면 되는 서비스다. 차량 전시 건물 구성부터 거대한 중고차 자판기를 표방할 예정이다. 10층 아파트보다 높은 주차 타워를 투명한 강화유리로 덮어 누구든 밖에서 차량들을 볼 수 있다. 이는 해외에선 미국의 카바나, 중국의 알리바바 등이 이미 인기를 모은 사업 모델이다.

적정 온도 유지, 실시간 재고 관리 이점

스마트 자판기 열풍은 잇단 규제 완화와도 관련이 깊다. 정부는 2020년 사전 성인 인증을 통해 자동 결제하는 방식의 AI 주류 자판기를 규제 완화 대상으로 선정, 소상공인 영업장이나 편의점 등에서 본격 도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지난해엔 공유주방과 전통시장 반찬 가게 등이 만든 즉석식품의 자판기 이용 판매가 가능하도록 하는 규제 특례를 승인했다. 위생 안전성이 입증된 업체 식품, 온도 감지기가 탑재된 스마트 자판기라는 전제 조건을 붙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 스마트 자판기 열풍은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기업들이 앞 다퉈 스마트 자판기를 도입 중인 것은 소비자의 편의성·접근성 향상을 노린 때문도 있지만, 경기 침체 우려 국면에 중·장기적 관점에서 인건비 등의 비용 절감을 목표로 한 측면도 강해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다만 일각에선 일자리 감소 외에도 몇 가지 부작용을 우려 중이다. 예컨대 중·장년층 이하 세대한텐 스마트 자판기 이용이 어렵지 않지만,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이용에도 애를 먹는 고령층엔 까다로울 수 있다. 결국 고령층은 소비에서 소외되는 ‘디지털 정보격차’ 문제가 심화될 수 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고령층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컴퓨터와 모바일 기기 등의 보유·이용 수준)은 지난해 69.1%에 그쳤다. 노인 10명 중 3명은 스마트 자판기 이용이 힘들 공산이 크다는 의미다. 고령층 전반의 디지털 정보화 수준 향상을 위한 교육 등 정부 노력이 동반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화상투약기의 경우 본격 도입 여부를 놓고 약사들의 반발이 여전히 거세다. 최광훈 대한약사회장은 “비대면 상담에 따른 의약품 오(誤)투약 가능성 증가, 지역 약국 시스템 붕괴 유발 등 문제점이 많을 것”이라며 “국민 건강권과 지역경제 보호를 위해 화상투약기 도입보다 공공 심야 약국의 운영 확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약사들은 또 화상투약기 모니터를 통해 얼굴을 비롯한 개인의 민감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고, 상담을 위해 약사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해서 사회적 손실이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 대당 1500만~2000만원인 화상투약기 구매 비용에 비해 심야 시간대 수요가 충분할지도 논란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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