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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잡기 급한 바이든, 각세운 빈살만에 석유 증산 설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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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호 14면

바이든 사우디 방문의 국제정치학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국왕과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를 만났다. 지난 13일 중동 순방에 나선 바이든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걸프 왕정 및 일부 아랍국가 정상들과의 조우도 앞두고 있다. 미국의 전통적인 중동 정책의 두 가지 목표가 이스라엘과 걸프 지역의 안정이었기에 동선은 자연스럽다. 마침 올해 대순례 (하즈)를 잘 마무리하고 희생제 축제를 기념하는 시즌이라 분위기도 좋다. 미국은 아브라함협정 후 첫 정상 방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수단, 모로코가 적대국 이스라엘과 수교를 약속한 아브라함협정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중동의 맹주를 자임하는 사우디를 설득, 이스라엘과의 수교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미국의 다음 목표다. 에어포스원이 이스라엘에서 사우디로 직접 날아가는 장면을 통해 중동 평화의 중재자 미국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일견 꽤 괜찮은 그림이다.

바이든, 중동 친미 진영 새판 짜기 전략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바이든 입장에서는 썩 내키지 않는 순방이다. 사우디 왕세자 때문이다. 2018년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사건 배후에 왕세자가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바이든은 이 사건을 좌시할 수 없었다. 30년 가까이 상원의원으로, 특히 주로 외교위원회에서 활동한 바이든 본인의 인권수호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홍콩 민주화 탄압, 신장 지역 위구르족에 대한 중국의 인권침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터다. 그러면서 정작 우방국의 인권 탄압에 침묵하는 것은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었다.

바이든은 왕세자를 압박했고 외교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종의 길들이기였다. 왕세자를 실각시킬 수는 없으나 최대한 미국의 우방에 걸맞은 행태를 받아들이게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왕세자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급기야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사우디는 석유 증산 문제를 논의하기 원하는 백악관의 요청을 거절하고 러시아와 공조했다. 1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 2분기 러시아산 연료유 수입을 2배 이상 늘렸다. 심지어 중국에 판매한 석유 대금을 위안화로 받기도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사우디의 도발이었다.

사우디는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이지만 최근의 전략적 가치는 이전 같지 않았다. 셰일 혁명 이후 중동산 석유 의존도가 낮아진 데다가 사우디의 시대착오적인 보수 와하비즘 이슬람 통치체제를 마냥 품어 주기도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미국의 중동 거리두기 전략도 한몫하며 사우디를 긴장시켰다. 충격적인 장면은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의 미군 전격 철군이었다. 20년간의 전쟁 끝에 탈레반에게 다시 정권을 내주면서 야반도주하듯 미군이 빠지는 모습에 전통적 친미국가, 특히 사우디의 심사는 복잡했을 것이다. 그동안 안보만큼은 미국만 믿어 왔지만 이제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섞여 있었을 법하다. 이른바 ‘방기’의 공포다. 그래서 더 바이든과 각을 세우며 반발했을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에 접근하며 위험회피(헤징)를 추구했던 것도 같은 맥락 아닐까?

그러나 반전이 나타났다. 최근 지정학적 충돌 양상과 함께 나타난 유가 변동이 사우디 등 걸프 산유국들의 입지를 순식간에 바꾸어 놓은 것이다. 코로나 극복 기대 심리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급 우려 등이 투기수요와 겹치면서 유가가 폭등한 덕이다.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미국은 일단 유가를 진정시켜야 했다. 공급 확대 신호를 통해 투기 수요를 잠재워야 하는데 증산여력을 제대로 갖춘 나라는 사실 사우디뿐이다. 미국은 다급했다. 그동안 구박했던 빈살만을 설득해야 했다.

결국 바이든은 사우디 행을 결정했다. 내심 많이 불편했을 것이다. 워싱턴 내 찬반여론도 갈렸다.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빈살만을 만나야 한다는 입장과 미국의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용인하는 것은 결국 국익을 갉아먹는 것이라며 순방을 반대하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고심 끝에 순방을 결정한 바이든은 일단 체면이 깎이지 않는 모양을 만들었다. 왕세자와의 단독 면담 대신 걸프 및 아랍국가들의 수반과 함께 자리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것도 사우디 살만 국왕과의 정상회담에 왕세자가 동석하는 형태다. 그러나 핵심은 바이든과 빈살만 두 사람에 달려 있다. 내심으로는 서로 마뜩잖을 것이 분명하나 함께하면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어떤 형태로든 양자 간 소통은 있을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를 같은 편에 두어야 하고, 사우디는 미국의 안보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접점을 맞추는 것이 이번 순방의 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순방의 배경과 별개로 미국의 중동 전략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반적인 기조는 중동에서 거리두기다. 보다 정확히는 ‘빠져나오기(exit)’에 가깝다. 미국 중동 정책의 오랜 두 목표는 이스라엘 안보와 석유 확보였다. 이제 이스라엘의 안보는 아브라함협정을 통해 대략 확보되었고, 중동산 석유의 중요성도 감소되었기에 굳이 직접 개입하며 소모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글로벌 테러 방지 명분도 있었으나 이제는 미 본토 테러 방어 역량도 충분히 갖췄다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대비 없이 손 털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구체적인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바이든은 미국의 직접 개입이 줄어든 빈 공간에 역내 세력균형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다.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사우디, 터키, 이란 등 역내 주요 국가 간 힘이 맞으면 큰 변고는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은 밖에서 이들 국가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역외 균형자(offshore balancer) 역할을 하려 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는 핵합의 복원을 통해 이란을 중립지대로 견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합의 당사자인 유럽이 중동에서 미국과 짐을 나누어지며 적절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랐다. 둘째는 사우디, UAE 등 미국의 전통적 우방들의 행태 변화였다. 특히 사우디의 반인권적 행태와 예멘 내전 개입, 왕실 내 반대세력 탄압 등을 견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바이든의 이 복안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란 핵합의의 당사국 중 하나인 러시아가 이제는 합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란의 원유 공급을 차단하여 미국을 방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핵합의 복원을 통해 미국이 이란 제재를 해제하기에 앞서 대러 제재부터 해제하라는 식으로 나왔다. 하지만 미국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은 중동 내 기존 우방국들이 미국과 충돌하는 행보였다. 사우디, UAE, 이스라엘 등은 대러 제재 동참을 거부했다. 현재 국면이 지속될 경우 바이든의 중동구상은 깨지게 된다. 즉 미국이 비운 자리에 친미 우방국들과 적대국 이란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춘다는 애초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사우디와 UAE가 석유 증산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바이든이 중동 순방에 나선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략 판의 변화가 감지되었기 때문에 현지 우방국들을 다잡기 위해서 나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는 사우디 길들이기 국면이 아니다. 오히려 다독여야 할 상황이다. 일단 미국은 걸프 국가들의 안보 지원을 다시 강화하려 할 것이다. 이란발 드론이나 미사일 공격에 취약한 사우디는 미국의 최첨단 방공망 배치 및 예멘 후티 반군에 대한 공격 무기 공급을 요구할 공산이 크다. 미국은 일정 부분 요구를 받아주면서 이스라엘과 사우디 간 협력, 나아가 양국 간 수교를 견인하려 한다.

바이든은 이제 이른바 역내 다자간 균형 추구 대신 진영을 통한 안정 구도를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스라엘과 사우디 등을 묶은 친미 국가군 대 이란이 견인하는 반미 진영으로 나뉜 구도다.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전체 상황을 관리하려는 포석이다. 본래 미군 유럽사령부 작전관할구역에 있던 이스라엘이 최근 중동을 관할하는 미 중부사령부 작전권역으로 편입된 배경이다. 아직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중동판 나토 구상까지 나오는 것도 이젠 생경하지 않다.

또 하나의 소식이 눈길을 끈다. 오는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란 테헤란 방문 뉴스다. 러시아, 이란, 튀르키예(터키) 3자 정상회담이 열린다. 마치 바이든의 중동 순방에 대한 맞불 같다. 친미 진영과 반미 진영이 갈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중동판 신냉전은 아니다. 여전히 미국을 전폭적으로 믿기 힘든 사우디와 UAE는 러시아와 일정 부분 접촉을 이어 갈 것이고, 튀르키예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으로 미국과 안보 협력을 유지하며 사안에 따라 진영을 넘나들 것이기 때문이다. 역내 세력균형 대신, 뭔가 느슨한 경계선 사이를 오가는 불안정의 동학이 눈에 들어온다.

푸틴, 19일 이란 방문해 미국에 맞불

그렇기에 바이든의 이번 중동순방은 의미가 남다르다. 7월 9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직접 게재한 칼럼에서 바이든은 미국의 중동 관여 정책을 공언했다. 새롭고 더욱 기대할 만한(new and more promising) 장(章)을 열기 위해 순방에 나선다고 언급했다. 기존 중동 출구 전략의 수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방국을 다독이며 중동 지역을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서는 인도태평양전략도 붕괴할 수 있다는 판단 아닐까.

그런데 독특하다. 칼럼 말미에 바이든은 이렇게 문단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9·11 이후 미군이 중동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 지역을 방문하는 첫 대통령입니다. 앞으로도 이 기조가 계속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되게 하는 것이 내 목표입니다.” 결국 관여는 하지만 전쟁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미국의 중동 정책 뉘앙스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더는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은 없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바이든 모두 이 점에서는 같다. 군사력 대신 외교력으로 관여하겠다는 미국의 중동정책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국제사회는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영국 더럼대에서 중동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가안보실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립외교원 아중동연구부장을 맡고 있다. 『지정학적 시각과 한국 외교』 등 국제정치 분야에서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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