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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정무의 그림세상

미술관 바캉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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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때 이른 열대야와 장마가 교차하고 있다.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울 때다. 이참에 ‘미술 바캉스’는 어떨까. 무엇보다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해외 스타작가들의 대규모 개인전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독일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트 작가 히토 슈타이얼을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여기서 멀지 않은 아트선재센터에서는 미국 조각가 톰 삭스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식 감성과 심오한 독일 철학, 유쾌한 미국식 유머를 느낄 좋은 기회인데, 전시 규모가 상당하기에 이 셋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하루가 모자랄 수도 있다. 먼저 화사한 프렌치 감성이 넘치는 장-미셸 오토니엘의 ‘정원과 정원’을 살펴보자. (8월 7일까지, 입장료 무료)

꼭 외국 나갈 필요가 있나
서울서 만난 스타작가 셋
프랑스·독일·미국의 오늘
더위 식히고 안목 키우고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의 전시 ‘정원과 정원’.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연못 양쪽에서 열리고 있다. 유리조각과 조명의 만남이 환상적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프랑스 작가 장-미셸 오토니엘의 전시 ‘정원과 정원’.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 연못 양쪽에서 열리고 있다. 유리조각과 조명의 만남이 환상적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오토니엘은 2011년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개인전을 비롯해 몇 차례 국내에 소개됐기에 이젠 우리에게도 낯익은 작가다. 이번에도 그를 상징하는 유리구슬 조각이 미술관 내부와 외부 곳곳에 자리한다. 특히 전시장 바닥에 청색 유리벽돌 7500개를 네모반듯한 형태로 깔아 놓고 그 위에 유리 조각 시리즈들을 띄워놓았는데, 전체적으로 조명과 어우러져 지극히 환상적이다.

평소 작가는 관객들이 자기 작품을 보며 잠시나마 평소와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 같은 그의 예술적 목표는 덕수궁 정원 연못에 놓인 유리조각 ‘연꽃’과 ‘장미’를 통해 멋지게 구현된 것 같다. 전시는 흥미롭게도 서울시립미술관뿐만 아니라 인접한 덕수궁 연못으로도 이어지는데, 그는 여기서 2015년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대에서 보여준 다이내믹한 움직임이 아니라, 정적인 움직임과 소담한 크기의 구슬 조각으로 잔잔한 여운을 준다.

오토니엘의 작품은 별다른 준비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히토 슈타이얼의 전시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체력과 지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9월 18일까지, 입장료 4000원) 총 23점의 영상작품을 평균적으로 10분씩 감상한다 해도 대략 230분이 걸린다. 주제도 인공지능·알고리즘·팬데믹·다국적 자본주의처럼 무겁다. 이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모두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을 오랫동안 고민해온 작가이기에 짧게라도 몇 작품 살펴보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접근할 만한 작품도 있다. 전시장 2부에 자리한 ‘안 보여주기: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에서 슈타이얼은 우리 주변에 널린 CCTV나 웹캠, 인공위성 등에서 숨을 수 있는 5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빅 브러더와 빅데이터 속에 살아가는 디지털 인류의 피곤함을 익살스럽게 잡아내고 있다. 슈타이얼의 영상작업은 대개 ‘아날로그 vs 디지털’ ‘문명 vs 반문명’ ‘독점자본 vs 자유’ 같은 이항대립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질 좋은 비평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디지털로 업그레이드된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현대문명 비판을 맛봤다면, 미국식 유머와 여유로 긴장을 푸는 전시장으로 옮겨가 보자. (톰 삭스, 스페이스 프로그램: 인독트리네이션, 8월 7일까지, 입장료 1만원) 여기서 관객들은 미국식 유머란 미국 시트콤의 유쾌한 분위기 정도를 연상했으면 하고, 미국식 여유란 휴일 오후 넓은 창고 같은 곳에 틀어박혀 오랫동안 꿈꾸던 장난감을 만들거나 인형놀이에 푹 빠질 때 드는 행복감을 떠올렸으면 한다.

만능 조각가를 자처하는 작가 톰 삭스는 꿈꾸는 모든 것을 자기 손끝으로 재현해 낸다. 그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조차도 패트병이나 종이 같은 간단한 재료를 통해 만들어낸다. 그가 만든 기계들은 허접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동 가능한데, 이는 지하 1층 아트홀에서 제공하는 7개 동영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2시간 분량으로 일일이 섭렵하긴 어렵겠지만 여름휴가라는 긴 호흡으로 도전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황금 같은 휴가를 온전히 미술에 바치기에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휴가가 휴식과 분위기 전환을 통한 재충전의 시간이라면 미술관 투어는 그 목표에 아주 잘 부합하는 체험이 될 것으로 믿는다. 막상 미술관 투어를 마치고 나면 굳이 바다 건너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이국적 정서에 푹 빠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예술적 휴식, 이만하면 근사하지 않은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