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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미·중 충돌에도 한국은 한·중·일 협력 촉진자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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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한·중·일 외교장관 가상 토론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지난 6월 서울에 소재한 한중일 협력사무국(TCS) 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한·중·일 정상은 2008년부터 각국을 돌아가며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역내 교류·협력 증진을 통해 평화·번영의 동북아를 추구하려는 분위기를 고조했다. 2011년 11월 TCS 설립은 그러한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미·중 대결 격화로 한·중·일 협력은 갈림길에 섰다. 코로나19 탓도 있겠지만 2019년 이후 화상으로라도 3국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상징되듯 새 정부 출범으로 한·미·일 협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미·중 갈등이 한·중·일 협력에 도전 요인이 되는 상황이다.

한·중·일은 숱한 갈등에도 상호 발전 자극해온 중요한 이웃
3국 간 협력 증진은 한·미·일 관계 보완하고 미·중 갈등 완화
지정학적 중간 지대인 한국은 3국 협력을 끌어낼 잠재력 커
한·중, 한·일 관계 개선이 중·일에도 이롭다는 사실 설득해야

3국 정상회담 2019년 이후 중단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3국 국민 간 서로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도 크게 악화한 상태다. 가치 공유국이라 할 수 있는 한·일 간 국민 감정도 좋지 않다. 외교안보와 경제, 문화 교류를 분리하자는 주장도 정치와 경제가 더욱 밀접히 엮여 있는 현시대에는 점점 통용되기 어렵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한·중·일이 역사적으로 많은 갈등과 충돌을 겪었지만 크게 보면 서로의 발전을 자극하고 촉진해 왔다는 사실이다. 국가 간 관계가 나빠지면 이사라도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한·중·일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임을 3국의 국력과 국제 위상이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도 한·중·일 협력이 증진돼 한·미·일 협력을 보완하고 나아가 미·중 갈등을 완화함으로써 지역과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긍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가장 작은 나라이자 지정학적으로 중·일의 중간에 위치한 한국이 외교적으로 한·중·일 협력 촉진자 역할을 수행할 잠재력은 크다.

한국이 확고한 한·미 동맹과 긴밀한 한·미·일 협력 체제 아래 한·중·일 협력을 증진하는 지혜를 발휘한다면 우리 외교를 한 단계 고양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미·중 대결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마라톤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더욱 그렇다. 한·중·일 외교장관들의 비공개 가상 토론으로 3국 협력 방안을 모색해본다.

중국의 경제보복은 모두에 손해

◆박진 외교장관=한·중·일 협력 증진은 중국이 미국 동맹국인 한·일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고 미·중 갈등의 완충재 역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한·중 관계가 좋아야 한·중·일 협력도 순조롭다.

그런 점에서 첫째, 중국은 한·미 동맹 발전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 한·미 동맹은 군사안보적 안전망이자 이념적 기둥이며 경제적 풍요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이 사드 사태에서처럼 한·미 동맹 진전을 경제 보복 등으로 억지하면 한·중 관계가 나빠져 양측 모두 손해를 본다.

둘째, 중국은 나토가 러시아를 겨냥하는 것처럼 한·미, 미·일 동맹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란 관점을 넘어서는 사고가 필요하다. 중국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안정을 위한 한·미 동맹의 순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한·미, 미·일 동맹이 없었다면 이 지역의 안정이 담보될 수 없었고, 역내 국가 간 군비 경쟁마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역의 안정자로서 한·미 동맹이 중국에 이로운 점도 있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한·중 관계 개선과 한·중·일 협력이 촉진돼야 한다고 느끼는 한국인도 많다. 이들의 생각이 옳다는 분위기가 한국에서 퍼지도록 중국이 노력해 주기를 기대한다.

일본과 관련해선 한·일 관계 회복 조짐이 보이지만, 정작 나토 정상회담 때 한·일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이 과거사 문제로 한국을 가해자 취급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정부가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새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한·일이 협력해야 할 일이 많다. 일본은 과거사 문제가 한·일 관계의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고 새 시대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해 함께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자유주의 vs 권위주의’ 구도 안 통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미국이 군사·경제·가치 등 전방위적으로 중국의 숨통을 조이려 하고 있다. 중국이 패권적 야망을 품고 있다는 건 미국과 서방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동맹국도 없고 해외에 변변한 군사기지 하나 없는 중국이 어떻게 강력한 동맹과 최첨단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 대적할 수 있겠는가. 다만 중국은 미국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옥죄면 미국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군사력 증강을 통해 전쟁 억지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1980년대 일본 경제의 폭발적 발전에 위협을 느껴 일본을 견제한 것 이상으로 중국의 경제적 도약을 억제하려 한다.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한·일·대만과의 반도체 연합전선 등은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경제적 선전포고다.

그러나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 중국은 주요 무역국이다. 중국은 2030년 전후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 된다. 중국은 국제 공급망 구축 선도 국가로서, 세계 빈곤 축소, 국가 간 경제 격차 해소, 인류 복리 증진에 기여해왔다. 미·중 경제 디커플링은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다. 대부분 국가는 미국의 중국 경제 견제 노력에 무조건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또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낡은 프레임으로 중국을 궁지에 몰아넣으려 한다. 한·일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보유하는 데 이의가 없으나, 중국 체제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 데는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중국 정치를 비판하는 건 중국의 고립·고사를 노린 것이다. 현인 정치가(statesman)로 인정받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도 서방 기준의 민주정치를 펼치지 않았다. 그는 중국이 서방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면 붕괴한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의 정치를 보면 누구를 위한 자유민주주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한·미·일과 달리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을 최우선으로 해 성공하고 있다.

한·일이 군사안보적으로 미국과 손잡고 중국을 견제하면서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이익만 취하겠다는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한·일 정부는 중국을 적대시하고 반중 감정을 부추기는 언동을 자제해 달라. 지금과 같이 힘든 상황일수록 10년 전 한중일 협력사무국을 만든 초심으로 돌아가 경제·문화·인적 교류 등의 협력을 확대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한국의 창의적인 역할 기대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일본은 중국의 경제 발전에 걸맞은 군사력 증강 노력을 이해한다. 그러나 중국이 기존의 국제 군사안보 질서에 도전하고 이를 변경하려 할 때 문제는 달라진다. 신흥 대국이 현상 변경을 시도하면 충돌이 불가피했다는 것은 1, 2차 대전 등의 역사가 증명한다. 중국의 위협적 남중국해 접근, 솔로몬 제도 등 해외 군사기지 건설 추진, 대만해협에서의 군사 동향 등은 중국 입장에서는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등 이해 당사국들은 현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나토가 확장되고 일본과 한국이 나토와 연계하려는 배경을 중국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국제 규범과 질서를 존중하고 국민의 경제적 복리와 인권도 고려하면서 세계 평화·번영에 공헌하는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중국에 최선이다. 미·소 냉전 시대 옛 소련이 민생 경제는 소홀히 하고 미국과의 군사 경쟁에만 집중하다 패배한 것은 많은 교훈을 준다. 중국은 옛 소련과 달리 거대한 경제력·군사력을 겸비하고 있지만, 독일이 강력한 경제력·군사력으로 패권국이 되려는 야심으로 2차 대전을 일으켰다 패망한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경제력·군사력을 바탕으로 기존 세계 질서를 변경하려는 유혹을 억제해야 한다. 중국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미국에 조언할 수 있는 만큼, 중국은 일본이 미·중 관계가 평화·공존의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기 바란다.

한국 정부가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등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고심하는 걸 평가한다. 다만 한·일 간의 기존 협정을 저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의 일관된 입장임을 분명히 한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자 배상 판결은 냉철한 법 논리를 저버린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라 할 수 있다.

한국은 경제에서 일본과 대등하게 경쟁하고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 위치에 왔다. 한국도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역할을 통해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으려면 정치 편의주의보다 국제 규범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한·미·일 협력뿐 아니라 한·중·일 협력 활성화를 위한 한국의 창의적 역할에 기대가 크다.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