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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착취 사회와 분별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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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덴마크에 ‘게으른 로베르트’라고 불리는 사내가 산다. 본명은 로베르트 닐센. 대학을 다녔으며 사지도 멀쩡한데,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해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10년 넘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살았다는 사람이다. 맥도날드에서 취업한 적이 있는데, 업무량이 과도하다 느껴 그만뒀단다.

로베르트는 TV 토크쇼에 나와 유명해졌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은 덴마크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거라고. 사람이 왜 꼭 일을 해야 하느냐고. 이후 덴마크에서는 복지 정책 축소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다. 로베르트는 제도를 고치겠다는 총리와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각자도생과 플랫폼 경제의 시대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적이 됐다
느낌과 욕망에 삶 맡길 수 있나

나는 로베르트와 대화한 적이 있다. 그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4년 뒤였다. 나는 덴마크의 복지 제도를 취재하는 한국 TV 프로그램의 출연자였고, 코펜하겐의 자치 지구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한데 게으른 로베르트는 내가 품었던 선입견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퍽 진지하고 차분했으며,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아마추어 철학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대마초 냄새가 밴 방에서 내가 “스스로를 디오게네스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보느냐”고 묻자 로베르트는 “아니, 소크라테스요”라고 대답했다. 옳은 말을 해서 미움을 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의 주장에 설득되지는 않았는데,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릴 ‘한 방’을 찾지는 못했다. 헤어지기 직전 나는 망설이던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무슨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로베르트는 1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센서빌리티(Sensibility).”  감성·감정·감수성으로 번역하는 그 가치를 자신이 창조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 뒤로 한동안 나는 가끔 그 말을 일없이 곱씹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때문에 ‘센서빌리티’에 대한 생각이 곧잘 ‘센스’로 넘어가기도 했다. 오스틴의 책 제목은 한국에서 ‘분별과 다감’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로베르트는 정말 어떤 가치를 만들고 있을까? 감수성을 만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최근에 한 인문학 포럼에 참석했다. 쟁쟁한 교수님들과 연구자들 사이에 공대 나온 소설가가 끼어 있어도 되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주제 발표들이 흥미로웠고 난상토론도 재미있었다. 난상토론 중에 ‘인문학의 쓸모’가 화제로 오르자 모든 발언자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엇, 뜨거워.

그날 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사 마시며 공원을 설렁설렁 걸었다. 뒤늦게 멋진 문장이, 낮에 했어야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인문학은 ‘분별력’이라는 가치를 만듭니다. 그게 인문학의 쓸모입니다.” 상상 속에서 혼자 열변을 토했다. “분별력은 현대 사회가 값을 잘 쳐주지는 않지만, 대단히 귀중한 자원입니다.”

사실 이 자원은 점점 희소해지고 중요해지는 중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분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미덕이나 종교의 가르침이 힘을 잃고, 큰 어른 역할을 할 지도자도 딱히 안 보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뿐 아니라 사리분별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다. 요즘 내 삶의 방향과 의미를 말하는 타인은 스승이 아니라 내 지갑을 노리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기착취 사회를 살고 있기에 분별력이 더 절실해졌다고도 본다. 이 시스템에서 개인의 가장 큰 적은 종종 그 자신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자기착취라는 말은 노동 관련 용어였다. 자영업자의 과로,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 혹은 ‘열정 페이’ 같은 이슈를 다룰 때 쓰는. 이제 바야흐로 기행으로도 돈을 버는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 세상이 열렸고,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뿐 아니라 존엄성까지도 쥐어짜낸다.

할리우드 영화에는 ‘네 느낌을 믿어봐’ 같은 대사가 자주 나온다.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은 억압적인 분위기에 분개하는 이들은 ‘욕망을 긍정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느낌과 욕망이 그리 현명한, 혹은 따뜻한 선장이던가. 오히려 변덕스럽고 무자비한 폭군 아니던가. 느낌과 욕망이 삶의 방향과 의미를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나는 그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 아마추어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련다. 내가 착취당하는지 아닌지 점검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다. 노동력을 넘어, 존엄성의 차원에서는 더 그렇다. 수치심 같은 느낌이 도움이 될 테지만, 더 필요한 능력은 역시 분별력이라고 본다. 나는 로베르트 역시 기이한 자기착취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의심한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