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시비의 본질/당강령에 있는 내용 공개가 왜 문제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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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각제 논의를 둘러싸고 여당이 결국 갈라서게 될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같은 당의 총재와 대표최고위원이 마치 반대당 지도자들처럼 등을 돌리고 그 여파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냉소주의는 또 한 단계 깊어가고 있다.
이같은 정국혼란의 본질은 정치인들 스스로가 판 함정인만큼 이를 다른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 말고 냉철한 상황판단을 바탕으로 풀어나가야 된다고 우리는 본다.
내각제가 처음부터 3당통합의 뼈대가 되는 민자당의 강령에 명기되어 있다. 이 강령이 내각제를 의미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한 것이다.
이때 이미 3당통합의 주역인 1노2김은 내각제 개헌에 합의한 것이다. 그 다음에 세 사람이 서로의 말을 묶어놓기 위해 각서를 쓰고 서명을 한 것은 그런 실질적 합의를 문건으로 남긴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합당 초기과정에 있었을 법한 상호불신이 그런 합의각서의 작성을 불가피하게 했을 필요성을 그들 스스로는 느겼을지 모른다.
오히려 정치체제의 기본을 바꾸기로한 합의를 마치 없었던 것처럼 위장하면서 안에서는 그 합의사항을 추진한 행동이야말로 시대착오적 망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 비밀각서가 공개된 사실이 마치 이번 민자당 내부파동의 원인인 양 보는 견해는 본말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본다.
이 파동의 본질은 합당의 목적이 3계파간의 동상이몽에서 연유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영삼 대표나 김종필 위원은 제3,제4당의 옹색한 입지를 벗어나 다음 차례에 대권을 장악해보려는 동기를 품었을 것이고 노 대통령도 그 나름대로 전 전 대통령의 퇴임과 같은 방식으로 임기를 마치지 않기 위한 정치 구도를 마련하는 것이 「구국적 차원」의 의지에 겹쳤으리라는 것도 항간에는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설이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분당위기에 처한 여당이 자구책을 쓴다면 이런 백중지란의 근본원인으로 되돌아가서 파벌주의의 이해를 절충하고 조화시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 주위를 한없이 맴돌며 지엽적 문제를 본질인 양 호도하려는 민자당 수뇌부가 자당문제와 정국정상화에 접근해야 할 올바른 자세임을 자각하기 바란다.
결론부터 앞세운다면 여권은 13대 국회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하는 논거는 여권의 개헌추진의 의도와 발상,행태가 모두 개헌을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는 데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내각제로의 정체변경이 왜 이 시점에서 우리 형편에 절실한가라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먼저 묻고 싶다. 지금이 과연 개헌문제로 집권당이 양분되고 국론을 극도로 분열시키는 소모전을 할 때인가.
우리는 정치가 개헌론으로 결딴나는 양상으로 치달아도 되는 그럴 때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더군다나 개헌론이 차기 집권구도와 관련한 여권 내부의 심각한 권력다툼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현실은 더더욱 피해야 된다고 본다.
정치지도자와 정당이 시대상황이나 먼 장래를 원려해서 정체변경을 논의하고 추진하는 것은 하등 나무랄 일이 못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해야 함은 민주국가의 기본원리다.
그럼에도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씨 등 민자당 3인 수뇌부가 시한부의 내각제 개헌에 합의하고 그 자체를 놓고 내부에서 시끄러워진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민자당이 국민은 물론,자기 동아리도 외면한 채 3인이 합의한 사항을 비공개 사항처럼 다루고 그로 인해 정치를 시끄럽게 한다면 다른 국사ㆍ정사는 어떻게 다루어질지 너무 딱한 생각이 든다.
내각제 그 자체가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적합하냐 안하느냐의 여부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차기 대권의 고지와 향방 때문에 3계파가 이전투구해왔음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 됐다.
이런 판국에서의 내각제 추진은 여권의 양분은 논외로 치더라도 국론의 날카로운 양분현상이 심화되어 정치불안과 사회혼란만 확대 재생산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우리는 개헌추진이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내외정세가 개헌론으로 여권이 양분되고 정치가 무한정 경색되어 극심한 사회혼란과 불안을 장기화시켜도 좋을 계제가 결코 아님은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여권 수뇌부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민자당의 민정ㆍ공화계가 이같은 상황논리를 무시한 채 내각제 개헌에 계속 연연한다면 정국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형태의 경색과 혼란만 촉발ㆍ심화시키고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ㆍ불신당할 뿐임이 명약관화한데도 그에 집착하는 이유를 우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여권이 내각제 개헌을 꼭 하고자 한다면 예컨대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사를 확인한 후 추진하는 것이 상황논리에도 맞고 일의 순서에도 맞는다고 본다.
여권이 이번 13대 국회에서는 개헌을 안한다는 확고부동한 태도를 밝히는 것만이 여권 내분을 조기에 수습하고 정국의 정상화는 물론,국민의 의혹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거듭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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