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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제비와 귤꽃과 향기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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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며칠 전 아침에 문득 제비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훌쩍 떠났던 제비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돌아온 것이다. 제비가 많이 사라지면서 제비가 하늘을 낮고 높게 재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지만, 제주에서는 아직 제비를 자주 볼 수 있다. 제비가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알아차리게 된 일은 내게도 어린 시절 이후로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어린 제비들이 먹이를 물고 날아오는 어미 제비를 둥지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장면을 보고서 나는 산문시 ‘제비 1’을 짓기도 했다. 졸시는 이러하다.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

봄날 맞아 처마에 돌아온 제비들
소금과 같은 귤꽃 향기도 한가득
꽃향기 맡으며 말의 향기를 생각

진흙으로 지은, 달무리 같은 그 집으로 먹이를 물고 날아가는 어미 제비를 보는 순간 내 어머니 생각이 났다. 마늘이며 고추 농사를 지어 장날에 팔러 가던 내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 생각을 하게 했던 제비가 올해에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 진흙집을 지으려고 처마 아래로 날아든다. 머잖아 제비의 집은 완성될 것이다. 그러면 제비집에는 오목하게 또 밝은 하늘이, 상공(上空)이 담길 것이다.

귤밭에는 귤꽃이 한창이다. 흰 꽃이 만개했다. 귤밭을 지나가면 향기가 온다. 바람이 크게 일어나지 않아도 향기는 만개해서 이쪽으로 저절로 온다. 언뜻 보면 귤꽃 핀 귤나무는 소금을 쌓아놓은 것 같다.

한기팔 시인은 시 ‘서귀포 2’에서 귤꽃 피는 때의 감흥을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귤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짧지만 서정적인 시이다. 서귀포가 고향인 시인이 육지에 사는 박용래 시인에게 보낸 시로 알려져 있는데, 나는 이 시에서 ‘하얀 날’이라고 쓴 대목을 참 좋아한다. 귤꽃의 흰 빛과 파도가 부서지는 그 포말의 흰색과 밝은 햇살이 이 ‘하얀 날’이라는 시구에 모두 담겨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귤밭을 지날 때면 이 시와 함께 환성지안 스님이 쓴 선시(禪詩) ‘상춘(賞春)’도 생각난다. 스님은 ‘지팡이 챙겨들고 오솔길 찾아/ 홀로 배회하면서 봄을 즐기노라/ 돌아오는 길 향기가 소매에 가득하니/ 나비가 멀리서부터 사람을 따라오누나’라고 읊었다. 특히 3행과 4행이 절창이다. 넓은 옷소매에 봄꽃 향기가 가득 들었으니 그 향기를 맡으러 나비가 사람을 뒤따른다는 것이다. 지금 제주에는 귤밭에 귤꽃이 가득가득하고 그 향기 또한 넘치고 넘친다.

향기 얘기를 하다 보니 내가 최근에 만난 두 분의 말씀 생각이 난다. 두 분의 말씀에는 모두 향기가 있다. 이 두 분은 사람을 참 친절하게 다정하게 맞이한다. 한 분은 스님인데, 스님은 절 입구에서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절에 찾아오는 분들을 반긴다. 또 절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자꾸 주려고 한다. 옆에 빵이 있으면 빵을 나눠주고, 옆에 마실 커피가 있으면 커피를 나눠 먹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물이라도 한잔 드시고 가세요.”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사람들은 환하고 정이 많은 이 환대의 말씀에 기분이 좋아지고 조금은 또 수줍어하며 연신 웃는다.

다른 한 분은 각재기국이며 고등어구이를 내놓는 식당 주인이다. 연세가 많은데도 정정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다. 이 분은 손님들 테이블을 하나하나 옮겨 다니며 뭐가 좀 부족한지를 살펴 더 내주고 이렇게 한마디 한다. “서너 번이라도 더 갖다먹어라!” 그러면 식당 안에는 한 차례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두 분의 말씀에는 귤꽃 피운 귤나무에서 나는 향기 같은 게 있다. 말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공장을 세운다/ 세쌍둥이 나비들 채용하고/ 꽃들의 미소와/ 침묵의 향기로/ 굴뚝을 올리고/ 푸른 연기를 피워 올려/ 헛소문들은 접근금지/ 대낮이 부처꽃탑을 쌓는다.’ 김수복 시인의 시 ‘고요공장’ 전문이다. 공장을 세우되 나비와 꽃과 침묵으로 짓겠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래야 미소와 향기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런 고요공장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의 둘레를 갖춘 하나의 제비집, 귤꽃 흐드러지게 핀 한 그루 귤나무, 그리고 다른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는 그 향기의 말이 바로 이 고요공장에 해당할 것이다. 고요공장은 모두에게 이롭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