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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임제의 시하 흐르는-회진 영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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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산이 높이 솟아 있으면 물은 더 멀리 흐른다. 추풍령에서 목포 반도를 향해 갈기를 세워 치닫던 노령 산맥은 나주시를 서쪽으로 벗어나면서 신걸산을 세워놓는다.
신걸산의 마루턱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거기 실낱같이 흐르는 물이 영산강이다.
나주시의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10리쯤에 구진포가 나오고 구진포에서 굽어 도는 영산강을 끼고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거기 회진 마을이 나오고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마당가에 서있는 영모정을 만나게 된다.
회진은 물길이 번창하던 시대에 황해로 들고 있던 고깃배와 짐배들이 몰려들었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먼 통일신라 때 회진현이었던 것을 보면 영산강 상류의 포구로서 영화로운 한 시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과 물이 빼어나>
조선조의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의 병장인 강항이 이곳을 가리켜 「호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한 만큼 예부터 산과 물이 빼어나기로 이름 높았고 삼한 시대에는 쟁탈의 요새로 흙으로 쌓은 회진성이 그날의 흥망성쇠를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회진에 와서 가슴이 끓어오르는 것은 저 조선조의 우뚝한 시인 백호 임제의 마르지 않는 시의 대하를 보게 되는 일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평안도사로 부임해 가는 길에 개성 황진이 무덤에 잔을 붓고 읊었다는 이 한편의 시조만으로도 우리는 임제의 넘치는 시정과 마음 그릇의 크기를 잴 수 있다.
인성의 자유로움을 오히려 눈흘겨 보던 시대, 낡은 인습과 도덕률에 칭칭 감겨 있던 조선조 의식 구조 속에서 가식과 위선의 갓끈을 풀고 마음껏 시상의 자유로움을 펼친 시인이 임제 말고 또 누가 있던가.
우리 시조 문학사에 가장 뜨겁고 가장 우렁찬 목청으로 백미를 이룬 두편의 시조와 『백호집』 『부벽루상영록』 등에 수록되어 전해오는 1천수를 헤아리는 한시와 허균이 「하늘과 땅 사이의 위대한 작품」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한 소설 『수성지』를 비롯한 『원생몽유록』 등의 문학 작품들이 어떻게 씌어진 것일까.
손가락 끝으로 하늘을 휘젓고 붓을 들면 땅이 울리는 한없이 넓고 한없이 깊은 시의 못물이 어디서 샘솟는가. 그 남상은 바로 여기 영모정 (나주군 다시면 신풍리)에서 찾게 된다.
임제는 명종 4년 (1549년) 이곳에서 대대로 학덕이 있는 나주 임씨 가문의 혈손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버지 진과과 어머니 남원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그가 조선조를 쩌렁하게 울린 문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요, 조상이 물러준 것임은 조부 붕과 아버지 진의 삶의 모습에서 명증하게 드러난다.
조부 붕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린 정의로운 현인이었고 아버지 진은 무장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데 노심초사했으며 오랜 관직 생활에도 사사로운 이익을 털끝 만한 것도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백두서 한라까지>
『활지어 팔에 걸고 칼 갈아 옆에 차고 철옹성 변에 통개 베고 누웠으니 보완다 보왜라 소리에 잠못 들어 하노라』
이 시조는 아버지 임진의 작품이다. 저 충무공의 『한산섬 시』를 연상케 하거니와 그 보다 한시대가 앞섰으니 무장이 아닌 시인으로서의 기백이 역력하지 않은가. 이 한편의 시조만 봐도 아들 임제의 시재가 어디서 왔는가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또한 영모정도 진이 지은 것이니 임제가 여기서 영산강과 회진벌을 굽어보며 무량의 시를 퍼 올린 것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글 잘하는 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지어 장차 큰 시인이 될 것 임을 내다보게 했다. 16세까지 약 10년간 김흠에게서 글공부를 했는데 그때 이미 대문장의 틀을 닦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호는 임제의 외가가 있는 곡성옥과의 무진장 벌을 가로지르는 섬진강의 백사장에서 붙인 것이다.
또 하나의 호인 풍강은 회진 앞을 흐르는 영산강의 다른 이름인 풍호강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니 어려서 고향인 회진과 옥과를 왕래하며 학문을 닦고 시정을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임제는 스물두살 때 당대의 석학 대곡 성운의 문하로 들어간다. 을사사화에 형 성근을 잃고 처가가 있는 속리산 종곡에서 시와 거문고로 여생을 달래던 성운에게 52세나 아래인 임제는 나이로는 손주 뻘도 안 되었지만 그 총명과 예지는 깊이 사랑받는 바 되었다. 큰 스승 밑에서 흠뻑 경학과 시문을 익히고 산을 내려온다.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는 산을 떠나는구나』 (도불원인인원도 산비리속속리산)
이때 이미 그의 시는 오묘한 경지에 다다른 것임을 알겠거니와 그위에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 가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 .임제가 성운의 문하로 들어간 것부터가 벼슬을 위한 공부를 하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8세에 생원·진사에 합격하고 29세에 알성 문과에 급제해 탄탄한 벼슬길을 약속 받는 바 되었으나 그보다는 시인 옥봉 백광훈,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 등과 아울려 시를 짓는 일에 더욱 골몰했다. 그리고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 나라의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산과 물을 노래하고 정조를 마음껏 쏟으며 나라 사랑의 드높은 기상을 시로 풀어내는 것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 구나』 그는 개인적 정서에만 매달리는 시인이 아니었다. 그의 사상은 나라의 자주성 회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시혼은 오히려 옛 고구려 땅을 되찾고 강대한 자주 국가로서의 세계를 호령하는 비원 앞에서 더욱 불꽃을 튀겼다.

<39세로 세상 떠나>
그 불기 (부패), 그 종횡무진, 그 탈속, 그 한량없는 사랑은 당대에나 후대에나 시를 아는 이들로 하여금 부러움을 사기에 넉넉했다.
이식은 그를 평해 『임제는 석자 칼을 차고 세상을 꾸짖고 사는 드문 영웅이다. 병법을 익혔고 시의 오묘함을 체득했다』라 했고 이항복·신흠 등은 시단의 맹주로 받들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백호는 호방한 기상으로 얽매이는데가 없었다』고 평하는 등 조선조의 글 잘하는 이들은 임제와 그의 글을 다투어 칭찬하는 데에 인색치 않았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라며 황진이의 무덤에 시를 바치는 그 멋스러움은 임제가 아니고는 흉내도 못 낼 일이요,「북천이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라고 시조를 지어 기생 한우의 대구를 받아 내는 자재로움도 임제만의 것이다.
평양 기생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일화도 시인 임제의 생애에 얹히는 아름다운 화관이 아닐 수 없다. 그는 39세로 세상을 여의었지만 다른 시인의 3백세보다도 더 풍요한 시와 사랑, 정신과 사상을 남기고 갔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질 것을 모두 가지고 신이 사는 마을로 돌아간 것이리라.
신걸산 마루턱에 높이 자리잡은 임제의 무덤에 올라 「청초 우거진…」을 다시 한번 되뇌 본다. <사진=조용철 기자>

<회진에 와서>
1
바다는 이제 오지 않는다
뒤숭숭한 소문들도 끊긴지 오래다
흰 억새꽃이 강바람을 흔들어도
영산은 제 얼굴을 묻은 채
쓰러져 잠들어 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구진포의 산허리를 빠져 나온
남행 열차가 빈들을 가로지르고
모래를 나르는 트럭들이
들풀의 여린 꿈을 밟고 달린다.
2
범람하라
푸른 돛폭을 올리지 못하는
산 같은 설움을 비로 쏟아라
붓이 칼이라 한들
이 나라의 방방곡곡을
무슨 먹물로 갈아붙이겠느냐
구성진 가락을 바다에 못다 흘리고
안으로 썩는 물은 물이 아니다
범람하라
마침내 산도들도 하나가 되는
해일 같은 웃음을 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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