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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김인 국수를 추억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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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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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1인자의 계보는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박정환-신진서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국수의 계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오늘은 지난해 타계한 김인(사진) 국수와 그의 시대를 회고해 보려 한다.

미술사가 유홍준이 남도 1번지라 명명한 전남 강진이 김인의 고향이다. 바둑판을 안고 상경해 15살에 전문기사가 되었고 8년 후 조남철 아성을 무너뜨린다. 왕위전 6연패, 국수전 6연패, 패왕전 7연패 등 30번을 우승하며 한국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연간승률 88.1%, 40연승은 20여년 후 이창호에 의해 깨질 때까지 한국 최고기록이었다.

김인의 바둑은 굵고 뭉툭하다. 2선을 기는 법은 거의 없다. 그의 인격도 비슷하다. 두툼하고 묵직하다. 그는 바둑을 고귀하게 여겼고 바둑을 통해서 삶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어느 결승전에서는 불리하지도 않은데 돌을 던진 일이 있다. 심정의 선율이 흐트러져 스스로 글렀다고 단정한 것이다.

그는 가만히 웃을 뿐 평생 누구를 비난하지 않았다. 자기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승리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했고 바둑의 기술자가 아닌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런 그에게 TV 속기의 등장은 고통이었다. 세트장의 뜨거운 조명 아래서 땀 흘리며 숨 가쁘게 두는 바둑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는 대신 TV 바둑의 출전을 포기했다. 그는 ‘鉤玄’이란 글귀를 자주 썼다. 갈고리 구, 검을 현. 진리를 낚는다는 뜻이다. 그는 수 세기 전 사라진 바둑의 도를 가슴에 품었고 그게 혹 남에게 드러날까 봐 수줍어했다. 그런 김인을 나는 ‘허구의 병법가’라고 불렀다.

김인은 그냥 웃었다. 김인은 실제로는 가장 먼저 9단이 됐지만 한국기원의 행정착오로 조훈현이 1호 9단이 됐다. 그는 이 과정이나 착오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조훈현이라는 기재의 등장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조훈현이 자신의 타이틀을 모두 가져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김인을 말하려면 ‘술’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한국기원이 있던 종로 관철동의 낭만적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기원은 시인 박재삼 선생이 매일 출근했고 시인 신동문 선생과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라 불린 철학자 민병산 선생의 단골 출입처였다. 그밖에도 많은 소설가, 기자들이 한국기원에 북적였다. 그들은 술을 좋아했고 김인은 이들과 어울렸다. 천상병 시인이 ‘천원’을 받아내는 즉시 막걸리 집으로 달려가는 것도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말을 한다. “김인 국수 시대에는 세계대회가 없어 국내를 제패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김인은 너무 일찍 목적지에 도달했고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었다. 그게 술에 빠져든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인은 소박했다. 옛것을 좋아하고 변치 않는 것을 연모했다. ‘천천히’라고 말하며 빠른 것을 피했다. 1인자가 치러야 할 사교모임에 가면 진땀을 흘렸다. 산을 좋아해 아들 이름을 산이라 지었다. 김산. 그는 친구들과 산을 찾았고 소주를 마시며 유유자적했다. 도연명의 시를 참 좋아했는데 이런 낭만적 요소가 승부사로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순정파였다.

나는 김인이 순정파였기에 술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느 날 술병 속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김인국수 1주년 추도식’이 그의 묘소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조훈현 9단 부부가 참석했다. 또 놀랍게도 일인자 계보의 막내 신진서 9단과 여자 최강자 최정 9단이 나란히 참석했다. 김인도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벚꽃 흐드러진 아름다운 봄날, 우리는 김인이라는 한 낭만적 승부사를 추모하며 거듭 술잔을 올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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