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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폭우 오는데 매번 물 퍼날라" 韓대형산불 이거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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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천수텃밭에 나무와 돌로 만든 물모이가 있다. 사진 한무영 교수

서울 노원구 천수텃밭에 나무와 돌로 만든 물모이가 있다. 사진 한무영 교수

"비가 많은 나라인데…정말 난센스(non-sense)"
슬로바키아에서 온 환경운동가 마이클 크라빅 박사의 말이다. 그는 지난 6일 강원 동해시의 한라망상공원의 산불 피해 현장을 방문했다. 3년 전 산불로 빼곡했던 나무가 다 타버리고 지금은 묘목들이 듬성듬성 심어진 곳이다. 크라빅 박사는 "한국은 여름에 폭우가 쏟아지는데 봄마다 산불을 끄려고 땅에서 물을 퍼다 나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라고 했다. 비영리재단 '사람과물'(People and Water)의 이사장인 그는 1999년 세계적인 물 관리 공로를 인정받아 환경분야 노벨상이라 불리는 골드만 환경상을 받았다.

크라빅 박사는 환경재단의 초청을 받아 지난 5일 국회에서 열린 식목일 기념 긴급토론회에 참석했다. 발제자로 나선 그는 산림생태계에서 빗물을 머금는 방법으로 산불을 극복하고 있는 유럽의 사례를 소개했다.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슬로바키아엔 물모이 10만개

크라빅 박사는 슬로바키아의 '산림 빗물 저장 방식'을 소개했다. 슬로바키아는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120km²의 산림을 잃었다. 같은 장소에 폭우가 쏟아진 지 겨우 1년 뒤였다. 이때 환경 전문가들 사이에선 빗물을 저장해 산불을 막자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숲에 있는 나뭇가지와 돌을 쌓아 물이 빠져나가지 못 하게 하는 초소형 웅덩이(water retention measure)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한무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는 이 웅덩이를 한국말로 '물모이'라고 번역했다. 대형 산불 이후 슬로바키아에는 10만개가 넘는 물모이가 만들어졌고, 큰 산불로 인한 피해는 사라졌다.

산림이 복원된 슬로바키아 타트라 국립공원의 모습. 사진 한무영 교수

산림이 복원된 슬로바키아 타트라 국립공원의 모습. 사진 한무영 교수

크라빅 박사에 따르면 물모이가 있는 산에선 작은 순환이 일어난다. 높은 산에 고인 물이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수증기는 구름이 되어 다시 비로 내린다. 물 순환으로 산불 방지뿐 아니라 산림 생태계가 확장돼 탄소 포집 효과까지 얻는다는 게 그의 논리다. 최근엔 폐플라스틱·폐비닐로 숲속 물 저장시설을 만들면 자원순환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물모이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은 설치 비용이다. 16년 전 슬로바키아에선 산림 1ha(헥타르)당 400~670만원의 물모이 설치 비용이 들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3~5년 안에 투자 비용을 모두 회수했다고 분석했다고 한다. 크라빅 박사는 "성인 2명이 1시간이면 작은 물모이를 하나 만들 수 있다. 주민과 시민단체의 자발적 활동, 기업의 친환경 사업을 정부가 지원하면 비용은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물모이, 여름에 비 쏟아지는 한국에 적합"

정부 차원에서 빗물 저장 시스템을 활용하는 국가는 아직 많지 않다. 하지만 슬로바키아 사례를 토대로 독일, 폴란드, 포르투갈, 체코, 호주, 미국 등에서 물모이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시민들이 산림에 자발적으로 물모이를 만드는 문화가 정착된 인도도 선도 사례 중 하나다. 크라빅 박사는 "여러 나라에서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초기 단계지만 힘을 얻고 있는 산림 물 관리 방식"이라고 했다.

빗물 저장 방식은 한국의 대형 산불을 막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 국내 산림 시설은 빗물이 떨어지면 곧바로 흘려보내도록 만들어졌다. 크라빅 박사는 기존 배수 시설은 최소한으로 남기고 빗물 저장 시설을 국내 숲 곳곳에 확충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강수량의 70%가 여름철에 집중되는 한국의 특성상 빗물 저장은 필수다. 산림의 물 관리 방식을 원점에서 생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마이클 크라빅 박사(오른쪽)와 한무영 서울대 명예교수. 편광현 기자

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마이클 크라빅 박사(오른쪽)와 한무영 서울대 명예교수. 편광현 기자

한편 산림청은 크라빅 박사의 주장을 토대로 물모이 시범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다만 산사태 등의 위험성이 있어 3~4곳의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이병두 국립산림과학원 과장은 "국내 산림에서도 물이 잘 모이는지, 비가 쏟아졌을 때 범람하지 않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안전성과 효과가 입증된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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