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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영관의 한반도평화워치

외교가 곧 통상, 전략적 융합으로 국제위기 넘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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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통상정책, 달라진 게임의 룰

한반도평화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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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세상이 난세로 접어들고 있다. 안보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 사례다. 만일 서방이 러시아를 제어하지 못하면 대국들이 소국들의 주권을 짓밟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갈 수 있다. 이념 측면에서는 서방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국제규범 준수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들에 의해 심하게 도전받고 있다.

이러한 기존 질서의 파괴 양상은 경제 통상 측면에서도 뚜렷하다. 2차 대전 이후 자리 잡은 자유무역 다자경제질서는 이미 옛날이야기다, 2001년 시작된 세계무역기구(WTO) 도하라운드 협상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WTO 상소기구는 위원 전원이 공석이어서 기능 중지 상태다. 이제 관리무역, 보호무역이 일상화했다. 이 같은 변화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 초부터 가속하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떠받쳐주던 미국의 상대적 힘(권력)이 약화하였기 때문이다.

미국 파워 흔들리며 자유주의 세계질서도 무너져
미·중 패권경쟁, 외교안보 없는 통상정책 무의미
기업활동 차질 없게 정부가 해외공급망 관리해야
해외공관 활용 등 통상업무 외교부로 복귀시켜야

이처럼 국제정치경제 질서가 바뀌면 한국처럼 시장 규모는 작은데 무역으로 먹고 살아온 나라는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바뀌는 세상을 제도가 따라잡지 못해 어려움이 생기는 분야가 바로 통상 분야다.

지금 한국의 정부 조직은 통상과 외교가 분리되어 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 외교통상부의 통상 기능을 산업부로 이전했는데 산업을 아는 사람들이 통상을 해야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과거 세월 좋았던 자유무역 시대에는 통상과 외교안보가 분리되어 있었다. 다자 자유무역질서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체제, 그다음 WTO 체제가 작동했고, 외교안보를 몰라도 통상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통상 영역에 정치적 고려가 개입하면 국제규약 위반으로 지탄받았다.

경제논리로만 풀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이제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무역이나 투자의 경우에도 기업가 개인이 경제적 비용과 이득을 따져 순수히 경제 논리로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이 중국에 중요 부품을 공급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미국 정부가 개입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상대방 정부를 건너뛰고 한국·일본·대만 등의 업체 대표들을 직접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담판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국제규범을 무시하고 보조금을 지원하며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자, 그것을 비난하던 미국도 이제 비슷하게 가고 있다. 미 하원이 지난 2월 4일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 보조금을 지원하도록 하는 취지의 미국경쟁법안(The America COMPETES Act of 2022)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제 통상과 외교를 분리할 수 없게 됐고, 완전히 게임의 룰이 달라졌다.

한국도 통상과 외교 기능을 융합시켜 정무적 판단 아래 전략적 통상외교를 펼쳐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통상 기능을 외교부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왜인가? 예를 들어 글로벌 공급망이 미국·중국·유럽연합(EU) 중심 등으로 분리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의 활동에 차질이 없도록 하려면 정부가 안정적으로 해외 공급망을 관리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전 세계 국가들에 설치되어있는 안테나 역할을 하는 재외공관을 활용해 그곳의 정치, 안보, 환경 규제, 자원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수시로 파악하고 조기 경보와 문제 해결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외국 정부와 통상 문제가 생겨 교섭할 때도 현지 상황을 보다 더 잘 알고 정부 관리들과 평소에 접촉해오던 현지 외교관들이 훨씬 협상에 유리하다. 우리는 지금 그런 이점들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통상 따로 외교 따로’는 시대착오

정부도 요소수 대란을 겪으면서 해외 현장(재외공관)과 국내 경제통상 부처 간의 유기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대외경제장관회의와는 별도로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신설하여 외교·안보적 함의가 있는 여러 국내외 경제 문제들을 함께 점검하도록 한 것은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외교부와 재외공관이 경제외교 기능을 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외 통상교섭 권한이 산업부에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러시아 제재와 관련해서도 미국 주도의 제재 대열에 신속하게 참여하지 못한 것을 두고 외교부와 산업부 간의 책임 공방이 있는 듯 언론에 나오고 있다. 수출 통제를 집행하는 주무 부서인 산업부로서는 우리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신중한 검토를 했을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요즈음 새로운 상황에서는 큰 정치·안보적인 맥락의 고려가 없이 기업들의 이득 ‘하나’를 위해 통상정책을 하다 보면, 결국 기업들에 ‘둘 셋’의 해를 끼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통상과 외교를 분리하기 힘든 사례는 많다. 사드 배치로 중국이 경제 제재를 가해오고 과거사 관련 외교 분쟁에서 일본이 소재·부품 수출 중단으로 나오고, 미국이 민주주의 동맹과 우방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통상 네트워크를 짜나가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우리만 ‘통상 따로 외교 따로’인 상태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산업부는 산업 진흥에 충실해야

바로 그런 이유로 캐나다·호주·뉴질랜드·브라질·아르헨티나·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이 외교부에 통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그중 캐나다는 외교통상부가 수출 통제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고, 호주 외교통상부는 중국의 무역 제재에 당당히 버티며 미국·영국·호주 안보협의체(AUKUS)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안보 차원에서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국내에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처럼 독립 기관과 같은 것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USTR은 거대한 미국 국내 시장을 무기로 다른 나라들의 시장을 개방해나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의회가 가진 통상 권한을 대통령 소속 기관인 USTR에 위임한 것이다. 한국과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바람직한 것은 통상 기능은 외교부에 맡겨 세계적 흐름에 맞추어 전략적인 경제통상외교를 하게 하고, 산업부는 본연의 산업 기능에 충실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기술 역량과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올인하게 하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가 자국 기업의 핵심기술 역량 확보를 위해 다양한 지원책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반도체나 배터리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산업이 4~5개만 더 생긴다면 주변 대국들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산업부가 우리 외교에도 크게 공헌하는 길이 될 것이다.

고차방정식보다 어려운 새 정부 통상전략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인태전략)이 중국을 타깃으로 하여 갈수록 촘촘하고 전방위적으로 짜여가고 있다. 지난 2월 11일 백악관이 발표한 새로운 인태전략은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동맹국 및 우방과 연대를 강화해 나갈 것을 밝혔다. 호주·한국·일본·태국·필리핀과의 5개 양자 동맹, 미국·일본·호주·인도 4국 간의 쿼드(QUAD), 미국·영국·호주 3국 간의 오커스(AUKUS), 그리고 한·미·일 3각 협력을 인태 지역의 중심축으로 엮어냄으로써 민주주의·규범·투명성에 기초하는 역내 질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인태전략의 경제적 수단으로 새롭게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IPEF는 무역 원활화, 공급망, 인프라, 탈탄소화, 수출통제·투자심사, 조세·반부패 6개 분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 견제가 궁극적인 목표라는 점에서 종래의 시장 개방 중심의 미국 통상협정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핵심 품목과 원자재의 대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핵심 신흥 기술의 중국으로의 유출을 통제하기 위한 국제 공조를 강화하는데 설계부터 실행까지 공동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혼자만으로는 중국 압박의 효과를 내기 힘들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 더욱더 강하게 미국의 요청이 들어올 것임을 의미한다. 이미 한국은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협력, 수출 통제와 투자 심사 정책 공조, 2050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도 미국의 타깃인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앞으로 어떠한 속도와 방식으로 미국의 인태전략에 협력해나가야 할 것인가가 문제다. 안보동맹인 미국과 협력을 해나가야 하는데, 중국 변수, 국내 업계의 고민을 어떻게 아우르는 통상전략을 짜나가야 할지, 고난도의 고차방정식이 새 정부 앞에 가로놓여 있다. 우리 기업들도 중국과 사업하는 것의 중장기 정치적 비용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고려하여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윤영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